어떻게 예배해야 하는가? 신앙의 선배들이나 교회에서 예배를 이야기할 때 가장 많이 지적한 것 가운데 하나가 예배를 보러 간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예배 보러 간다라고 하면 그 말이 틀렸다는 것입니다. 보러 간다는 것은 구경한다는 의미가 강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표현은 구경꾼으로서 그 자리에 앉아 있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이 드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보는 것이 의미가 없다는 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예배는 보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무엇을 봐야 합니까? 예배의 진정한 대상이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봐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그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사야가 보았다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무엇을 보았습니까?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것과 그의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한 것을 보았습니다. 스랍들이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람들이 또 이야기합니다. 예배는 보러 가는 것이 아니라 드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본다는 말은 수동적인 의미가 담겨 있지만, 드린다는 말은 능동적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드린다는 말 속에는 내가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키에르케고르라는 철학자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설교자가 무대에 선 배우이고 자신들은 그를 비난하거나 칭찬하는 비평가인 줄 안다. 그들이 모르는 사실이 있으니 바로 그들이 무대의 배우라는 것이다. 설교자는 단지 그들이 대사를 잊어버렸을 때 상기시켜주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사람일 뿐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관객‘이시다.”

3절에 보면 스랍들이 고백합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이사야는 5절에 보면 자기 죄를 고백합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 중에 거주하는 사람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나의 연약함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8절에 보면 이사야는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말씀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에 이렇게 반응합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이사야는 자기 자신의 삶의 목적을 내어 드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배드리는 자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드리기만 하면 잘 드리는 예배일까요? 성경이 말하는 예배는 일방적인 예배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 드리는 예배입니다. 사도 바울이 전도 여행을 하다가 아테네에 갑니다. 거기에는 수 많은 신을 모시고 있었는데 어떤 제단에 가보니까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는 제단도 있었습니다. 내가 누구에게 예배하는지 알지도 못하지만 무조건 예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그런 예배가 아닙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관계 속에서 드리는 예배입니다. 우리가 예배드릴 때 하나님은 그 예배를 받으십니다. 그리고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예배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그리고 찬양을 드리고, 기도를 드리고, 헌금을 드리고, 헌신을 드립니다. 그것으로 예배가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우리가 드리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을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복을 약속하십니다.

이사야가 자기 죄를 고백할 때 하나님은 용서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누구를 보낼까 말씀하실 때 이사야는 내가 가겠다고 응답합니다. 이것이 관계 속에서 드리는 예배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의 통치자가 되시고, 그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살아가는 삶이 되면 우리의 예배는 하나님을 누리는 예배가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누리는 예배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드리는 예배가 됩니다. 하나님의 응답이 있는 예배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