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디베랴 호수에 나타나십니다. 그때 제자들은 물고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그날 밤에 그들은 물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날이 새어갈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그들이 대답합니다. ‘없나이다.’ 그럴 때 예수님께서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였을 때 물고기가 너무 많아 그물을 들 수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때 오늘 본문에서는 등장하는 사람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소리 질렀다는 것입니다. ‘주님이시다.’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라는 표현은 요한복음에 5번이나 등장하고 있습니다.
요 13:23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가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요 19:26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요 20:2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
요 21:7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요 21:20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님 주님을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더라.
이처럼 다섯 번이나 등장하는 것을 보면 누군가 의도적으로 그 이름 대신에 이런 표현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는 누구를 가리키겠습니까? 24절에 가면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요 21:24 이 일들을 증언하고 이 일들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
그렇다면 왜 요한은 자신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고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라고 표현하였겠습니까? 물론 예수님께서 다른 제자보다 요한을 더 많이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부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12명의 제자 가운데 예수님께서는 사도 요한만 사랑하셨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모두 사랑하셨습니다.
마 17:1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요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 11:5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라는 표현은 예수님의 입장에서 쓴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사도 요한의 관점에서 부르고 있는 표현입니다. 객관적으로 예수님이 이 사람만 사랑한다라고 선포하신 내용이 아니라, 사도 요한이 자기 자신을 바라볼 때 예수님은 정말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시라는 고백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랑을 받으며 살아가던 제자들 속에서 유독 사도 요한은 자신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 다시 말하면, 자기 안에 있는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 가득 차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서를 통해 그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고후 5:14~15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