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당시 바리새인들과 종교지도자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의 방식을 대면하면서 무엇이 중요하고 우선되어야 하는 것인지 신앙의 체계를 다시 정립해 주고 계십니다. 바리새인들이나 종교지도자들은 율법을 지키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반대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율법들을 지키게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을 믿고 고백하는데서 출발합니다. 나의 죄를 대신 담당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시고, 죽기까지 나를 사랑하셨음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그래서 내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도록 해 주셨음을 누리며 나아가야 합니다. 성령이 내 안에서 나를 도와주셔서 마음껏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 되시는 삶을 살아가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이것이 내 신앙의 바탕에 깔린 믿음이어야 합니다. 그것을 추구하고 누리는 삶이 우리로 하여금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묻습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고 있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여기서 말하는 금식은 자발적으로 스스로 필요를 느껴서 하는 금식을 말하지 않습니다. 율법적으로 정해진 금식일에 하는 금식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역사 초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속죄일에만 금식하였습니다. 그러다 바벨론 포로 이후에는 일 년에 네 번씩 금식하였습니다. 그러다 예수님이 오실 당시에는 매주 두 번의 금식으로 바뀌었습니다. 원래 금식은 슬픔과 회개의 표시였습니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는 경건과 자기 헌신의 표현으로 드려졌습니다. 특히 바리새인들은 자기 신앙을 과시하기 위해 금식할 때 일부러 얼굴을 흉하게 하고 슬픈 기색을 하면서 기도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금식에 대한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은 이렇게 답변하십니다. 예수님은 좀 색다른 관점으로 답변을 하십니다. 혼인 집에서 손님들이 신랑이 있는데 금식하는 일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신랑이 빼앗긴다면 금식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답변하십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잔치는 지금 메시아 잔치를 지칭하고 있습니다. 그 메시아가 지금 여기 와 있는데 메시아를 기다리며 금식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합니다. 오히려 그 메시아를 누리는 것이 더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때, 예수님을 누리지 못할 때 그때는 금식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하면 그런 기도를 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막 2:21~22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 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
이것은 신랑을 맞이하는 우리의 자세를 말합니다. 우리가 금식과 같은 율법과 규례에 묶여 신랑을 맞이하려고 하면 그 신랑을 기뻐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새로운 신앙 체계를 가져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새로운 신앙의 틀 안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틀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때 하나님 나라를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 율법과 규례에 매여 살아가면 우리는 예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