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미)은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빼놓아선 안 될 중요한 속성이요, 우리가 추구해야 할 신앙의 목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에 대해 소홀했다. 어쩌면 오늘 한국교회가 성경 지식도 많고, 기도도 열정적이지만, 교회의 분열이 많고, 도덕적으로도 교만하다는 비난을 듣게 된 원인 가운데 하나가 그 때문이 아닌가 싶다. 무릇 신앙생활에서 진리만 강조하다 보면 자칫 교리논쟁에 빠져 분열에 분열을 거듭한다. 술 먹지 마라, 담배피지 마라는 도덕만 강조하다 보면 자칫 도덕적 교만이나 위선의 함정에 빠질 수 있다. 물론 좋은 신앙인이 되려면 건전한 교리도 필요하고, 도덕적인 생활도 필수적이다. 여기에 신자로서의 멋과 기품까지 갖출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진실하시며, 선하실 뿐만 아니라 아름다우신 분이다. 우선,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은 그분이 지으신 우주만물에 잘 나타나 있다. 그래서 본문의 시인은 자연세계 속에 나타난 그분의 아름다우심을 발견하고 찬양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운지요.”(1절과 9절)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은 예술작품들 속에도 드러난다. 하나님은 모든 예술의 토대가 되는 빛과 소리를 창조하신 분이다. 출애급 공동체가 광야를 지날 때 하나님께서 브살렐과 오홀리압이라는 두 명의 장인(예술가)들을 부르시고, 그들에게 특별한 지혜와 재능과 영감을 주신 이유는 회막(성막)과 성물을 아름답게 만들기 위함이었다. 실용적인 것도 필요하지만 아름다운 것은 더욱 중요하다.
그런데 인간만큼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잘 드러내는 존재는 없다. 하나님의 피조물 가운데 하나님의 모습을 가장 많이 닮은 존재는 바로 인간뿐이어서 본문에서도 인간을 ‘영화와 존귀의 관’으로 묘사했다.(5절) 물론 오늘 우리가 인간 세상에서 목도하고 경험하는 인간의 모습은 아름다움과 거리가 멀다. 심한 경우에는 인간만큼 부패하고 추한 존재도 없어 보인다. 그런데 인간이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가를 제대로 보여주신 분이 계신데 바로 예수님이시다. 그분은 죄로 오염되지 않은 유일한 인간이요, 아름다우신 하나님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신 분이다.
예수께서 보여주신 인간의 아름다움이란 외모가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 맺는 방식이었다. 그분의 외모를 보자면 여느 팔레스타인 남성처럼 유대 광야의 거친 모래바람과 태양빛에 그을렸을 것이다. 구약시대 예언자 이사야가 묘사한대로, 예수님은 고운 모양도 없고, 흠모할 만한 풍채도 아니었으며, 고통을 많이 겪어 지친데다가, 병을 달고 사는 환자처럼 초췌해서 마침내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돌릴 정도였다.(사 53장) 예수께서 보여주신 아름다움이란 외모가 아니라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이요, 세상 사람을 향한 자기희생의 아가페 사랑이다. 그 같은 겸손과 사랑의 삶 때문에 역사 속에 있었던 형벌수단 가운데서 가장 잔인하고 섬뜩하고 추한 십자가는 아름다움의 상징물로 바뀔 수 있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인 된 우리의 추함을 덮어주고, 더러운 오물을 정화시켜, 죄인을 의인으로 변화시키는 창조적 아름다움이다.
우리는 기도시간에 거룩하신 하나님이나 선하신 하나님만 아니라 아름다우신 하나님이라고도 불러야 한다. 하나님의 거룩과 선하심만 아니라 아름다우신 모습도 닮고자 힘써야 한다. 아름다우신 하나님을 그리고 닮으려고 힘쓰다보면 어느 날 사람들이 우리 모습 속에서 그분의 아름다움 곧 멋과 기품도 느낄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