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세 번에 걸쳐서 예루살렘을 침공합니다. 그첫 번째 침공은 B.C.605년에 여호야김이 왕으로 있을 때 쳐들어와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를 포함하여 유명한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갑니다. 두 번째 침공은 B.C.598년. 이때가 에스겔의 나이 25세였을 때입니다. 여호야긴 왕과 에스겔을 포함하여 약 만 명을 포로를 잡아갑니다. B.C.586년 시드기야왕 때 세 번째 침공을 하여 나머지 사람들을 다 잡아갑니다. 그리고는 유다는 완전히 멸망하게 됩니다.
에스겔의 사명은 이미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 와 있는 포로들에게 왜 우리가 끌려와야 했는지를 설명하고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이었습니다. 에스겔서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1장부터 32장까지는
이스라엘과 주변국들에 대한 심판을 예언하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34장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하나님의 계획, 즉 회복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에스겔서 34장에서는 주의 회복의 외적인 면을, 36장에서는 주의 회복의 내적인 면을 다루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여호와께서 에스겔을 통하여 회복을 선포하시는 내용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에스겔을 골짜기로 나가게 하셨습니다. 에스겔 3장 22절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부르셔서 파수꾼으로 세우실 때 들판으로 데리고 가십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예루살렘의 심판을 알려 주셨습니다. 이번에는 이 골짜기에서 하나님은 회복을 선포해 주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골짜기, 들판은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곳이고,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는 곳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이끌려 골짜기로 간 에스겔은 골짜기에서 마른 뼈들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마른 뼈를 보여 주셨겠습니까? 마른 뼈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까?
먼저 마른 뼈들은 죽어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원래는 시신이 있어야 하는데 시신의 형태는 보이지 않고 뼈만 있다는 것은 죽어도 완전히 죽은 상태라는 것을 누구도 의심할 수 없도록 보여 주고 있습니다.
또 하나 마른 뼈는 수치를 당했다는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묻힐 수 있는 자격을 잃어버린 시체들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성경에서 수치를 당했다는 것은 매우 절망적인 상태를 말합니다.
또 하나, 마른 뼈들은 흩어져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지금 마른 뼈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지 못합니다. 뼈와 뼈들이 연결될 수 있는 것은 뼈 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뼈와 뼈를 묶어주는 것들이 필요합니다. 이런 것들이 조화롭게 있지 못한 상태인 마른 뼈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지 못하고 흩어져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삶에 하나 되지 못하고 흩어져있는 것들은 무엇이 있습니까? 흩어져있는 마음들, 흩어져있는 관계들, 흩어져있는 소망들이 있다면 그것을 보아야 합니다. 흩어져있던 것들을 보는 것은 문제를 풀어가는 근원이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3절에서 하나님은 이런 마른 뼈들의 상태를 보고 있는 에스겔에게 이렇게 질문하십니다.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 하나님의 이 질문은 그렇다 아니다의 대답을 듣기 위한 질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 질문은 너희 속에 믿음이 있는가를 질문하고 계십니다. 그때 에스겔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이 뼈들이 자기 스스로 살아날 수는 없습니다. 우리 힘으로는 살아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지혜로도 살아날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면 이 뼈들이 살아날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 안에 이 백성을 회복시키시려고 작정하신 대로 그들이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에스겔이 보여 주고 있는 믿음의 고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