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자기 스스로를 밝히는데 매우 어려워합니다.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고백할 수 있는 자리에 서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리는 것을 봅니다. 오늘부터 우리는 내가 누구인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의 이야기 처음인 11절에 보면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어느 한 아들만을 특별하게 다루기 위해 이 이야기를 쓰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관점에서 두 아들을 다루고 있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두 아들의 모습을 대조하며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이야기의 시작은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내게 올 분깃을 내게 달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습니다. 둘째 아들이 요구하였지만 큰 아들에게도 동일하게 처리를 해 준 것입니다. 이것은 아들들이 자신의 재산을 임의로 처리할 수 있는 권한도 함께 가지게 된 것입니다. 아버지가 더 이상 자녀들의 삶에 개입할 수 없음을 말합니다.
둘째 아들은 유산을 받아 죄의 길로 들어갑니다.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돈으로 바꾸어 마음대로 사용합니다. 먼 나라, 허랑방탕, 재산을 낭비라는 단어들을 통해 둘째 아들의 삶을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14절에 ‘다 없앤 후’ 나라에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하게 되었습니다. 돼지를 치러 가지만 돼지 먹는 쥐엄 열매 조차도 제대로 먹을 수 없습니다. 이때 이 아들은 자신의 아버지의 집을 생각합니다. 그 집에는 종들도 양식을 풍족하게 먹습니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주려 죽게 되었는데 아버지에게 가서 말하기를 아들이라 말하지 말고 품군의 하나로 들어가도 이것보다는 낫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로 갑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아버지가 거리가 아직 먼데도 불구하고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춥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죄를 지었다고 말합니다. 아들이라고 불리기를 감당치 못하겠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종으로 대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22절에 보면 아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깁니다. 그리고 송아지를 잡아다가 잔치를 벌입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아들로 인해 기뻐합니다.
큰 아들의 이야기입니다. 큰 아들은 밭에서 수고하다가 집에 돌아옵니다. 그런데 집에 가까이 왔을 때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습니다. 그리고 종을 부릅니다. 무슨 일인지 묻습니다. 종이 사정을 이야기합니다. 그때 그는 노하였습니다. 화를 냅니다. 그리고 집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때 아버지가 나옵니다. 그리고 달랩니다. 권합니다. 그러나 큰 아들은 말합니다. 내가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었습니다. 내게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지 않았다고 불평합니다. 이것은 자신에게 해 준 것이 없다는 것을 느끼는 아들의 외침입니다. 또한 동시에 동생을 향한 분노이기도 합니다. 화를 냅니다.
우리는 누구입니까? 흔히 우리 자신을 큰 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교회를 떠난 적이 없습니다. 오랫동안 착실하게 신앙생활 했습니다. 그러니 나를 위해 염소 새끼라도 잡아 달라고 말합니다. 왜 이제, 저렇게 늦게 교회에 나온 사람들을 위해 잔치를 베푸느냐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 잔치가 있는 집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때 아버지가 말합니다.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우리는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 마음을 알 수 있는 자리로 변화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