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은 베드로가 경계를 넘어가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였지만, 여전히 유대인이었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삶의 원리를 적용하는 것보다 유대인으로서 어릴 때부터 가지고 있었던 삶의 방식이 더 익숙하다는 말입니다. 10장 9절에 보면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간 시간이 제 육 시라고 말합니다. 베드로는 유대인의 전통에 따라 오전, 정오, 오후 기도를 했던 사람이란 말입니다. 또한, 베드로는 유대인이 가지고 있던 음식 규정, 정결규정을 철저하게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아주 철저한 유대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환상이 있고 난 다음에 고넬료를 만나게 됩니다. 고넬료는 이방인입니다.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며 가까이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하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만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철저한 사고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이런 베드로를 이끌어 베드로가 가진 경계를 뛰어넘도록 안내하고 계신 것입니다.
가이사랴에 고넬료라고 하는 이달리야 군대의 백부장이 있었습니다. 가이사랴는 로마가 정복한 땅을 다스리기 위해 만든 도시입니다. 고넬료는 로마 사람입니다. 이방 종교를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탈리아 군대의 백부장입니다. 백 명의 군사를 이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경계를 넘었다고 소개합니다. 그가 유대인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이방인 유대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는 규칙적인 기도의 삶을 삽니다. 남을 구제하는 삶도 삽니다. 그런 것이 왜 중요한가 하면, 이런 외적 요소들로 인해 유대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그에게 베드로를 만나게 하십니다. 왜 베드로를 만납니까?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을 듣고 싶어서 불렀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복음을 듣기를 원한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37절부터 복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고넬료는 그 복음을 듣습니다. 그럴 때 이방인인 그에게도 성령이 임하십니다. 생명을 얻는 회개가 임하게 됩니다. 이렇게 하여 이방인이었던 고넬료가 예수님을 믿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처럼 사람들이 자신의 경계 안에 갇혀 있던 것에서 뛰어넘어 복음을 누릴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힘은 무엇입니까? 그것을 위해 성령 하나님이 일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성령 하나님은 각 사람 삶의 정황에 맞게 임하십니다. 성령 하나님은 베드로와 고넬료 모두를 찾아가셔서 환상을 통해 준비시키십니다. 성령 하나님은 사람들을 연결하십니다. 베드로가 복음을 선포하고, 고넬료가 복음을 들을 때에 그 말씀 선포 중에 성령이 임하십니다. 말씀이 들려지게 하신 것입니다. 경계를 넘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또한, 성령은 그들이 방언을 받고, 세례를 받는 곳까지 인도합니다. 이로 인해 유대인 신자들의 놀랄 뿐 아니라 예루살렘 교회가 인정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떻게 해야 우리의 경계를 넘어갈 수 있겠습니까?
경계를 허무는 삶을 누리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보는 시각을 넓혀야 합니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사람을 보기 시작해야 합니다. 또한, 복음의 메시지를 크게 보아야 합니다. 고넬료와 그의 집에 있던 이방인들이 복음을 들을 때 그 복음이 그들의 경계를 확장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소개할 때 그 놀라운 소식이 사람들의 경계를 허물 수 있음을 믿고 선포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사람들 안에서 하시는 일을 더 크게 보아야 합니다. 내가 기도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나겠는가? 라는 태도가 아니라 성령이 일하실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 분명하게 일어난다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더 크게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진 시각의 경계를 넘어 일하십니다. 모든 민족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바라보며 그 자리에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