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다
오늘 본문에 많이 등장하는 단어 가운데 하나가 본다는 말입니다. 여기 등장하는 본다는 말은 그 뜻이 여러 가지입니다. 3절에 보면, 걷지 못하는 자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였습니다. 그런 그를 4절에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함께 주목하였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그를 똑바로 보면서 요청합니다. ‘우리를 보라.’ 그랬더니 그가 그들에게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하여 바라보았다고 말합니다. 그런 그에게 베드로가 말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이것을 준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베드로가 한 말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말합니다. 이 사람은 뭔가 보이는 것을 기대하지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사람은 베드로가 오른손을 잡아 일으킬 때 반응합니다. 붙잡습니다. 일어섭니다. 뛰고 걷고 기뻐합니다. 이 사람은 무엇을 보았습니까? 분명히 보이지 않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보고 붙잡은 것입니다. 이것을 16절에는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면서 이것을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 표적
예수님께서 사역하실 때도 많은 표적이 나타났지만, 예수님이 승천하신 이후에도 믿는 자들이 모여 있는 곳에 성령께서 임하셔서 많은 기적과 표적이 나타났습니다. 그렇다면, 왜 기적과 표적이 있었을까요? 기적과 표적의 목적이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가 임할 것을 선포하시면서 행하시는 병을 고치는 것이나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나 죽은 자를 살리시는 것과 같은 행위들은 단순히 우리가 느끼는 특별한 일, 신기한 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사탄의 굴레에서의 해방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이 기적들이 하나님의 통치가 사탄의 통치를 전복함으로써 일어나게 되는 필연적인 결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런 기적들이나 표적은 앞으로 임하게 될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는 예언적 상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관점으로 오늘 본문을 보면, 나면서 못 걷게 된 사람을 치유하는 베드로와 요한의 사역은 초대교회가 앞으로 임하게 될 하나님 나라의 회복을 미리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사와 표적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회복되고 누리게 될 것인가를 보게 하는 것입니다.
- 성전
나면서 못 걷게 된 사람이 걷게 되는 표적을 보여주는 내용인 1절부터 10절까지 보면, 반복되는 단어가 성전입니다. 일반적으로는 걷지 못하던 자가 걷게 된 것이 더 크게 보일지 모르지만, 가만히 보면 성전이 중요한 주제임을 보게 됩니다. 걷지 못하던 자가 가진 가장 큰 한계는 성전을 누릴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의 한계는 성전 문 앞까지입니다. 그러나 그가 걷게 되었을 때 그는 성전 안으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묶여 있던 사람에게 성전이 회복된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기도 시간이 되어 성전에 올라가 하나님 앞에 나아갑니다. 예배합니다. 하나님을 누립니다. 그러나 나면서 못 걷게 된 이 사람의 마지노선은 성전 입구입니다.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구걸하는 것입니다. 구걸은 결핍입니다. 구걸은 절망입니다. 구걸은 하나님을 누리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이런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통해 그는 치유를 받게 됩니다. 그럴 때 8절에 보면,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했다고 하였습니다. 이 사람은 단순히 자신이 치유 받은 것에서 머물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의 가장 큰 기쁨은 하나님을 회복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