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이리로 와서 먹으라.’
14절에 보아스가 룻을 식탁에 초대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배고픔을 면하게 해 주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보다 훨씬 더 큰 은혜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포용입니다. 이 둘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먼저, 룻은 여자이고, 보아스는 남자입니다. 룻은 가난하여 보리 이삭을 주우러 온 자이고, 보아스는 그 밭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룻은 모압에서 온 소녀입니다. 그러나 보아스는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이런 차이들로 인해 보아스가 룻을 같은 식탁에서 밥을 먹게 한다는 것은 놀라운 포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보아스의 포용으로 보여주는 하나님의 포용을 보아야 합니다.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포용입니다. 그리고 그런 우리를 위하여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포용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그 포용을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은 당시 현장에서 많은 사람을 식탁으로 초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시 사회 문화에서 함께 식사해서는 안 되는 사람과 식사를 하셨습니다. 세리와 함께 어울리셨습니다. 죄 많은 여인과도 만나셨습니다. 바리새인과도 그리고 이방인과도 식사 자리에 함께 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당시 사회가 포용하지 않았던 자들에게 다가가셔서 그들을 포용하신 것입니다.
두 번째, ‘먹고 남았더라.’
14절 중간부터 보면 ‘그가 볶은 곡식을 주매 룻이 배불리 먹고 남았더라.’고 하였습니다. 룻은 초대받은 식탁에서 배가 부를 때까지 먹었습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갈 때 룻이 온종일 거두었던 엄청난 양의 보리를 가지고 돌아갑니다. 오늘 본문 17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룻 2:17 룻이 밭에서 저녁까지 줍고 그 주운 것을 떠니 보리가 한 에바쯤 되는지라.
에바는 약 22ℓ로 봅니다. 한 에바는 대략 22㎏으로 보면 될 것 같습니다. 당시 보리 추수하는 추수 꾼이 받는 하루 품삯이 보리 1ℓ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룻이 거둬들인 곡식의 양은 단순히 가난한 자가 수고하여 온종일 거두어들일 수 있는 양과는 전혀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엄청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보아스를 통해 룻에게 은혜를 베풀 때 일반적인 사람들이 경험하는 정도가 아니라 엄청난 풍성함으로 채워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져다주신 유익은 세상이 가져다주는 그런 단순한 유익이나 가치를 가져다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풍성함의 자리에 들어가게 하신 것입니다.
세 번째, ‘단 사이에서 주워라.’
신분의 변화를 누리는 자리로 들어간 것입니다. 율법에 따라 룻은 밭 가장자리를 따라 곡식을 거두며 부스러기와 남은 것을 줍는 것만 허용되었습니다. 이것은 이들의 신분을 보여주는 행위입니다. 15절과 16절에 보면, 보아스가 사환들에게 말하기를 룻이 곡식을 주울 때 곡식 단 사이에서 줍게 하고 책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뿐이 아닙니다. 그를 위하여 곡식 다발에서 조금씩 뽑아 버려서 줍게 하라는 것입니다. 23절에 보면 룻이 보아스의 소녀들에게 가까이 있어 보리 추수와 밀 추수를 마치기까지 이삭을 주웠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있는 소녀들과 같은 지위, 같은 자리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율법이 제한하고 있는 룻의 신분과 삶을 바꾸어 버렸습니다. 룻에게 완전한 자유를 주었습니다. 단순히 자유를 넘어 룻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자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에게 이런 새로운 신분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예수님으로 인해 우리의 신분이 바뀝니다. 우리의 정체성이 변화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