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일어난 사건이라 할지라도 생각하는 것에 따라 그것을 보는 시각이 전혀 달라집니다. 부활 주일에 우리가 사용하는 상징 가운데 하나가 바로 빈 무덤입니다. 빈 무덤은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확실하고도 놀라운 증거입니다. 그래서 빈 무덤을 통해 예수님께서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음을 선포하는 도구로 사용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빈 무덤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사용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무덤에 거하시던 밤에 제자들이 와서 예수님을 훔쳐 갔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일요일 아침에 여자와 제자들이 무덤을 잘못 찾아갔다는 것입니다. 죽음 직전에 계신 예수님, 의식을 잃어버린 예수님을 죽은 줄 알고 무덤에 데려다 놨는데, 무덤 안이 시원하여서 정신을 차리고 깨어났을 것이라는 시나리오들입니다.
본문은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가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무덤을 찾아갈 때 어떤 이유로 찾아가는가는 매우 중요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절에 보면,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을 찾아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몸에 바를 향품을 미리 사 두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예수님의 몸에 바르기 위해 안식일이 끝난 아침 일찍 무덤을 찾은 것입니다. 여인들이 향품을 사 두었다가 가지고 간다는 것은 지금 예수님의 부활을 보기 위해 가는 걸음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몸이 썩어질 것이기에 그 몸에 향품을 바르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시신은 무덤에 급하게 묻혔습니다. 정식으로 장례 절차를 치르지 못하였습니다. 그랬기에 예수님의 장례를 완전하게 하려고 지금 무덤을 찾은 것입니다.
12절과 13절에 보면, 예수님이 누워 계셨던 자리의 머리가 있던 곳과 발이 있던 곳에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있었습니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묻습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마리아는 자신의 슬픔 때문에 그들이 천사인지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마리아가 대답합니다.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천사를 향한 마리아의 대답은 오직 지금 빈 무덤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다 보니 이들이 천사인 것도 알지 못합니다. 또 다른 장면이 뒤이어 나타납니다. 예수님을 보았지만, 예수님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지금 빈 무덤에 온통 마음이 쏠려 있어서 다른 것은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묻습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고 있느냐?’ 여기에는 분명히 두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하나는 ‘어찌하여 울고 있느냐? 우는 이유가 무엇이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누구를 찾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때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았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여전히 알아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16절에 보면, 생각이 온통 빈 무덤에 갇혀 있는 마리아를 향하여 이렇게 부르십니다. ‘마리아야’ 예수님은 다른 설명을 하지 않으십니다. 그냥 평소의 목소리로, 평소의 인자함으로 부르십니다. ‘마리아야’ 그 한마디가 마리아의 눈을 뜨게 하였습니다. 그 한마디가 마리아의 귀를 열게 하였습니다. 아니 그 한마디가 마리아가 갇혀 있던 빈 무덤에서 살아나신 예수님을 볼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응답합니다. ‘랍오니’ 선생님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은 왜 무덤이 비어 있는지 설명하지 않으셨습니다. 마리아가 궁금해하고 안타까워하는 그것을 해명하거나 논리적으로 설명하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실의 영역에서 마리아에게 다가가지 않으시고 친밀한 사람의 영역, 즉 관계의 영역으로 다가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매우 개인적인 방법으로 다가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마리아의 생각을 깨트려 주셔서 예수님을 볼 수 있게 하셨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사건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사람에 대한 믿음에 관한 것입니다. 그것은 빈 무덤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 살아 있는 그리스도에 대한 반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