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헤미야와 이스라엘 백성들의 축제가 벌어졌습니다. 기쁨의 도가니를 형성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날을 “여호와의 성일”이라고 여기고 슬퍼하지도 말며 울지도 말기로 합니다. 이들은 왜 기뻐하는 걸까요?
느헤미야는 포로로 잡혀 아닥사스다의 술 관원이었다가 황폐해진 고향 소식을 들었고, 애달픈 마음이 곧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여김같이 한탄하며 기도하다가, 왕의 허락을 받고 예루살렘 성벽재건의 일을 시작했습니다. 상상할 수도 없는 일들이 순탄하게 진행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방해세력에 의해 고전을 겪고, 그럼에도 우여곡절 끝에 성벽을 재건했습니다. 그리고 7장에서는 스룹바벨과 함께 돌아온 포로 명단들이 나열됩니다. 성벽도 재건하였고, 백성들도 왔으니 이보다 더한 일이 무엇이 있을까요?
이스라엘 자손 모두는 수문 앞 광장에 모였습니다. 그들은 학사 에스라의 입에서 모세의 율법책이 낭독되는 것을 듣게 됩니다. 남자나 여자나 들을 수 있는 모든 이들이 광장에 모여 새벽부터 정오까지 율법책에 귀 기울입니다. 에스라가 율법책을 펴니 모든 백성이 일어났고, 낭독하니 모든 백성이 아멘으로 화답하며 경배하는 광경이 펼쳐집니다. 이것이 8장에서 나타난 기쁨의 도가니의 광경입니다. 이 광경은 유대교는 물론, 기독교 역사에 예전적인 큰 영향을 준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광경에서 나타나는 기쁨의 요인이 예배자에게 가르쳐주는 큰 시사점이 있습니다.
-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는 자발적으로 모이는 데부터 시작됩니다.
수문 앞에 모인 군중에 놀라운 특징이 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모였다는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모이라고 강요한 것이 아닙니다. 또한 학사 에스라가 모이라고 한 것도 아닙니다. 본문 1절에서 나타난, 율법책을 가져오기를 청한 주체는 느헤미야도 에스라도 아닌, 이스라엘 백성들, 그 자리에 모인 군중들이 원했던 것입니다. 신자의 기쁨은, 예배 공동체 속에서 누릴 수 있는 기쁨은 자발적으로 모이려는 의지가 앞설 때 누릴 수 있습니다.
- 말씀 앞에 모일 때, 진정한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들은 모여서 단지 근거 없는 기쁨과 축제를 벌인 것이 아닙니다. 자신들의 성과에 취해 번창할 미래를 놓고 기뻐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말씀 앞에 섰습니다. 말씀을 사모함과 동시에 말씀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그 자리에 모여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이 담긴 모세의 율법책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 했습니다. 지금껏 살아온 모든 날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기쁨은 말씀이었으며, 그 말씀 속에서 알게 되는 하나님께 향하여져 있었습니다. 그들의 기쁨의 근원은 하나님이었으며, 말씀이었습니다. 본문 10절에서 느헤미야는 말합니다.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 기쁨을 맛본 자는 기쁨을 흘려보낼 줄 압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삶으로 고백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요? 하나님 나라를 입으로 선포하면 될까요? 하나님 나라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큰 행사를 하면 하나님 나라를 삶으로 고백하는 것일까요? 네! 맞습니다. 그러나 그에 앞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으로 기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만족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 만족하며 하나님으로 충만하면 우리는 의도치 않아도 일상에서 기쁨으로 충만할 것입니다. 본문 12절에서 기쁨을 누리는 모든 백성이 가서 먹고 마시며 나누고 크게 즐거워했다고 합니다. 이는 우리가 말씀으로 밝히 안 사실로 인하여 은혜를 누리고 기쁨을 누릴 때, 그 기쁨이 우리에게서 흘러나와 삶에서 고백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삶으로 고백하는 하나님 나라”의 삶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