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라사 지방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무덤 사이에 살았습니다. 무덤 사이라는 말은 다른 사람과 완전히 고립된 삶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쇠사슬로도 맬 수 없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만큼 위험한 존재로 취급된 것입니다. 거기다가 소리를 지르며 돌로 자기의 몸을 해치고 있었습니다. 완전히 자아를 상실한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웃 사람들은 그를 멀리하고 두려워하며 아무도 그를 도와주지 않는 상태입니다. 이처럼 이웃 사람들은 그를 다스릴 수도 없고, 돌볼 수도 없고, 도와줄 수도 없는 상태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를 회복시켜 줄 힘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은 다가가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직접 대면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에게 말을 거십니다. 그의 이름을 물으십니다. 이름을 묻는다는 것은 그를 인격적인 관계로 대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게서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 주십니다. 그럴 때 15절에 보면, 그는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아 있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그를 치유하심으로 그가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도록 회복시켜 주신 것입니다. 삶이 회복될 뿐 아니라 이 사람이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도 말씀하십니다.
회당장 중의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자신의 어린 딸이 죽게 되었는데 아이 위에 손을 얹어 살게 해 달라는 간청을 합니다. 그런데 그 아이를 향해 가는 그 길에서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한 여자를 만나게 됩니다. 이 여인은 12년 동안 질병으로 인해 육체적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 여인이었습니다. 특별히 이 질병은 당시 종교적으로 부정한 자로 취급받는 그런 병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 매우 수치스러운 병이었습니다. 혼자서 어떻게든 해결해 보려고 몸부림을 치면서 전 재산을 다 허비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무리와 함께 걸어가던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용기를 내어 무리 가운데 끼어들어 온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사회적으로도 완전히 단절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런 여인을 향해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발걸음을 멈추십니다. 그리고 공개적으로 그녀의 믿음을 인정하십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육체적 치유만이 아니라 ‘딸아’라고 부르심으로써 그녀의 사회적, 영적 정체성까지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추구하시는 전인적 회복입니다.
예수님은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을 회복시키신 후 다시 야이로의 딸을 치료하기 위해 가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지체하심으로 인해 야이로의 딸이 죽게 됩니다. 그로 인해 회당장의 집에는 이미 사람들이 울며 심히 통곡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큰 고통이겠습니까? 예수님이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말씀하시니 그곳 사람들이 비웃습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예수님은 회당장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공개적인 장소가 아니라 소녀가 있는 방으로 들어가십니다. 그리고 그 아이의 손을 잡으십니다. 달리다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소녀가 일어나 걷습니다. 그럴 때 예수님은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죽음에서 살리실 뿐 아니라 회복의 삶으로 이끌어 가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연약함으로 인해 고통당하는 자들을 향하여 응답하시는 분이십니다.
목장 질문
- 여러분의 삶에서 힘이나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자리(직장, 가정, 교회 등)가 있다면 어디인가요? 그곳에서 그 권한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나요?
- 예수님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고 접근하셨습니다. 최근에 누군가의 필요에 관심을 가지고 돕거나 격려했던 경험이 있다면 나눠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