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사전에서 예배는 ‘개신교에서, 성경을 읽고 기도와 찬송으로 하나님에 대한 존경과 숭배를 나타내는 의식’이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을 읽고 기도와 찬송을 부르는 것은 존경과 숭배를 나타내는 의식입니다. 숭배라는 말은 가장 최고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도와 찬송을 통해 누구에게 존경과 숭배를 나타내느냐?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기도와 찬송을 하기는 하지만 나를 위로하는 기도와 나를 위로하는 찬송을 드린다는 것은 잘못된 예배에 빠질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는 예배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을까요? 창세기 22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산으로 가서 아들을 하나님께 바치려고 합니다. 그때 함께 갔던 종에게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이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겠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예배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예배의 뜻은 구부리다, 절하다는 의미입니다. 구부린다, 절한다는 말은 단순히 고개만 숙이는 정도를 말하지 않습니다. 엎드리는 것입니다. 엎드린다는 행동 속에는 완전한 복종과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존경과 경배의 모습이 함께 담겨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당시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종교화되고 형식화된 예배의 개념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께 묻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때까지 만 해도 예배는 어떤 특정한 장소에서 드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자기들이 예배드리는 사마리아에서 그리고 유대인들은 유대인들이 예배드리는 예루살렘에 가서 드리는 것이 참된 예배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동안 지리적으로 가지고 있던 예배의 개념을 예수님은 바꾸셨습니다. 요한복음 4:21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기존에 가지고 있는 개념을 완전히 바꾸십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온다고 말씀하시며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사역하실 때 많은 사람이 예수님께 달려가 엎드렸습니다. 앞으로 임하게 될 주님의 재림의 날에도 예배가 있게 됩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눈으로 뵙고, 삶으로 느끼고 그분의 하나님 되심을 누릴 때에는 어쩌면 예배드리는 것이 쉬울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예배를 드려야 하겠습니까? 20절에서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이 가진 소망은 단 한 가지입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살아있든지, 내가 죽든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시고, 존귀하신 분이시고, 가장 아름다운 분이시고, 가장 가치 있는 분으로 드러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예배라는 단어는 사용하지 않지만, 바로 예배의 핵심입니다. 그렇다면, 바울 안에 어떤 마음이 있기에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을까요? 빌 1:21에서 바울은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고 고백합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존귀함을 받으시고, 가장 가치 있는 분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는 중요한 근거는 바로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왕이 되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인도자가 되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삶의 주권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그 어떤 것보다 나에게 너무나 소중한 예수님이 내 안에 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위해 나는 죽는 것이 유익하다고 말합니다. 만약, 내가 돋아나고, 내가 살아나서, 주장하며, 내가 원하는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 몸부림치며 살아갈 때는 내가 드러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나는 죽는 것이 유익하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 고백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하게 하는 본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