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파는 어려움이나 장애와 같은 것을 헤치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고, 내가 하려고 하는 대로 될 때는 돌파가 필요 없습니다. 그냥 하면 됩니다. 그러나 돌파가 필요한 시대라는 것은 내부적으로든 외부적으로든 도전해야 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 어려움이 있고, 나태함이 있고, 낙심될 일이 있고, 위험한 일이 있는 그곳을 뚫고 통과하여 우리가 마침내 가야 할 곳을 보며 나아가는 것이 돌파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돌파할 때 성경이 우리에게 돌파하여 가게 하는 것을 분명하게 보며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돌파하는 것에만 초점이 있다면, 결국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서 하는 일이 되어 버리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바라보아야 하는 성경이 말하는 돌파는 어디로 가는 것이겠습니까? 예수님도 돌파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무엇을 향해 돌파의 길을 가셨습니까? 예수님은 십자가를 돌파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무덤을 돌파하셨습니다.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바라보아야 하는 궁극적 목적지는 부활하여 승리의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삶에서 돌파하며 살아가는 이유는 바로 그 부활의 기쁨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4장과 5장은 한 묶음의 사건입니다. 대적인 호론 사람 산발랏이 유다 사람들이 성을 건축한다는 말을 듣고 비웃는 말이 나옵니다. 처음에 보면 그는 자기 동료들과 사마리아 군인들이 듣는 데서 말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산발랏은 자기 위신, 체면을 차리고 있는 모습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보면 빈정거렸다고 번역하였습니다. 거기다가 암몬 사람 도비야가 옆에서 거듭니다. 그러나 6절에 보면, 느헤미야와 백성들은 계속해서 성을 쌓게 됩니다. 돌파하는 삶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되자, 7절부터 보면, 산발랏과 도비야가 오히려 더 큰 위협을 가합니다. 그것은 바로 사방 사람들이 한꺼번에 예루살렘으로 올라와서 성을 치기로 함께 모의하였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위협이 커지고,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멈추게 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지만, 느헤미야는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느헤미야는 그런 상황을 돌파하고 있는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돌파한 방법은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4절에도 9절에도 기도하였다고 말합니다. 기도한 다음 6절에 보면 성을 건축하여 비록 높이가 반밖에 되지 않았지만, 전부가 연결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시 오는 위협으로 인해 그들은 한 손에는 칼과 창과 활을 가지고 다른 손으로는 일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사방에서 몰려오는 대적들만이 문제가 아닙니다. 유다 사람들 사이에 이런 노래가 퍼졌습니다. 우리의 힘은 다 빠졌으니 우리 힘으로 이 성벽을 다 쌓지 못하리라는 것입니다. 12절에 보면 유다 사람들이 열 번이나 그들이 사방에서 우리를 치려 한다고 일러 주었습니다. 돌파하는 느헤미야와는 달리 백성들 가운데는 불안에 떠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5장으로 넘어가면 내부의 문제도 심각하게 드러납니다. 백성들의 울부짖는 소리입니다. 외부를 향하여 깨어 있어 돌파해야 하지만, 우리 내면도 돌파해야 할 일이 있음을 소개합니다. 백성들 사이에 있는 사람들이 없는 사람들의 밭과 포도원을 저당 잡히고 곡식을 얻고 세금을 바쳤습니다. 그 결과 이제는 자식을 종으로 팔아야 하는 형편에 처한 것입니다. 그러니 그 울부짖음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이방인의 손에 팔린 형제들을 겨우 찾아 고향에 오게 했는데, 이제는 형제들의 손에 팔린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이겠습니까? 그런 상황에서 느헤미야는 또 돌파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외친 것입니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