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나를 통해 일하심을 인정해야 합니다. 2절에 보면, 형제 하나니가 먼 길을 달려와 예루살렘의 상황을 알려줍니다.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자들’이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라고 말합니다. 큰 재앙 속에서 수치를 당하고 있으며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은 불탔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백성이 수치를 당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소식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느헤미야는 바닥에 주저앉아 울기 시작합니다. 이런 애통함이 느헤미야로 하여금 예루살렘을 향하여 귀환할 마음이 일어나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외부의 다른 어떤 사람을 통해 들려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때는 이렇게 가족을 통해 부르심의 자리로 이끌어 가실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가 수치를 당하고 있는 자리가 있다면, 그 수치의 자리가 회복되도록 우리를 부르시고 계심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수치 당함을 안타까워하고, 수치가 떠난 삶으로 재건되어야 함을 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보냄을 받은 자로서 오늘 여기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고향의 소식을 들은 느헤미야는 기도로 하나님 앞에 나아갑니다. 나를 보내시는 분과 동행하는 삶의 자세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굿, 선하신 하나님을 고백하였습니다. 5절에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선포합니다. 나를 부르셔서 일하시는 하나님은 선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나, 나의 죄, 나의 연약함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6절 끝부분과 7절에 보면, 크게는 이스라엘 자손과 아버지의 집을 말하지만, 거기에 자신을 포함하여 주께 악을 행하였다고 고백합니다. 민족의 죄는 우리 모두의 죄입니다. 가족의 죄는 우리 모두의 죄입니다.
잇, 이어가는 삶, 중보자의 삶을 고백합니다. 느헤미야는 6절에 ‘이제 종이 주의 종들인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주야로 기도하오며 우리 이스라엘 자손이 주께 범죄 한 죄들을 자복하오니 주는 귀를 기울이시며 눈을 여시사 종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서.’라고 중보하고 있습니다.
기, 기대입니다. 하나님이 회복시키실 모습을 선포함으로 하나님이 하실 일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8절 9절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돌아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 행하며 살아갈 때 하나님이 하나님의 이름을 두려고 택한 곳에 돌아오게 하실 것을 기대하는 고백입니다.
도, 도우시는 하나님입니다. 10, 11절에 하나님은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구원하시는 하나님,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는 분, 우리의 간구에 귀를 기울이시고 들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2장 8절에 ‘내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시므로 왕이 허락하였다.’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보냄을 받은 삶은 일상 속에서 살아내야 합니다. 흔히들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특별한 자리로 나아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생각하기를 오지에 가고, 죽음의 위기 앞에 놓여 있어야 하고, 가난과 고난 속에 있어야 보냄을 받은 자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어떤 때는 그런 위험에 놓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일상 속에서 보냄을 받은 자로 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는 가정이나 직장, 이웃 속으로 보냄을 받은 자로서 가정에서 사용하는 언어나 행동이 매우 일상적인 것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우리의 말속에 하나님의 이름을 거론하고, 예수님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이 영적인 삶이고 그렇지 않을 때 우리의 삶은 세상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우리 삶의 환경에서 매우 평범하고 일상적인 언어를 사용하지만, 그 삶이 분명하게 구별되어 있을 때 보냄을 받은 자로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