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살아가면서 낙심하는 일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나 자신을 바라보며 낙심하기도 합니다. 교회 안에서 신앙의 삶을 살 때도 낙심할 일이 일어납니다. 사실 낙심하는 것은 죄라거나 나쁜 것이라거나 절대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절로 내 안에 일어나는 감정일 때가 많습니다. 낙심의 뜻은 바라는 일들이 이루어지지 않아 맥이 풀어지고 마음이 상하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원하는 일이 잘되지 않을 때 낙심하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믿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복음의 삶을 살아가게 되면, 우리는 분명한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그중에 가장 큰 변화는 나의 의로 사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 사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 삶의 기준이나 평가가 내가 원하는 것, 내가 바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사건은 재미있게도 유다와 베냐민 자손들이 귀환한 이후 성전을 지으려고 할 때 그곳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자신들도 건축에 참여하게 해 달라고 요청함으로 시작됩니다. 그럴 때 귀환을 이끌던 리더인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기타 이스라엘 족장들이 같이 건축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그들이 방해하는 이유였습니다. 바사왕 고레스 시대부터 다리오가 즉위할 때까지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면서까지 그 계획을 막았다고 합니다. 6절에는 아하수에로 왕에게 글을 올려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을 고발했습니다. 그리고 7절부터 23절까지는 아닥사스다 때에 있었던 일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자그마치 약 백 년에 걸쳐 이들은 지속해서 유다 백성들이 성전과 성벽을 재건하는 일을 방해하였습니다. 4절에 그들은 유다 백성의 기를 꺾어 주고 겁을 주어 성전 짓는 일을 방해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이 대적들이 낙심하게 하고 유다 백성의 기를 꺾는 주된 이유는 바로 성전을 짓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성전을 짓지 못하게 한다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임재 아래 살아가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낙담할 수밖에 없는 삶의 자리에서 어떤 믿음으로 이겨내야 하겠습니까?
첫 번째로, 그리스도인의 삶에 반대와 시련이 있는 것은 정상입니다. 에스라와 느헤미야에게 임한 반대는 백여 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이것은 대적들의 반대와 시련은 정상적인 우리 삶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따르고 있다는 이유로 제자들은 거부당하고 박해를 받으며 감옥에 갇히고, 처참한 처형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세상은 자신들의 유익에 따라 그리스도인들을 돕기도 하고 방해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우리의 참된 통치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두 번째로 그리스도인은 낙담과 싸워야 하는 자들입니다. 우리 안에는 낙담할 수밖에 없는 연약함이 있습니다. 두려움이 몰려오면 어찌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 그리스도인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낙담을 수용하지 않고 그 낙담과 싸워야 하는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정체성은 나에게 오는 낙담을 그대로 수용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시기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도우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 아버지를 의지하여 낙담하지 않고 일어서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세 번째로 우리의 적은 우리를 결코 이길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대적들의 계략으로 성전공사가 멈추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예루살렘 성전과 성벽은 재건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반대했습니다. 마침내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았습니다. 그때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았으니 승리했다고 외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이 모든 일은 자기 백성을 구속하시려는 하나님의 완벽한 계획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