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요한계시록 21:1-4
제목: 영생, 아는 만큼 누리다!
- 문: 영생은 우리에게 어떤 희망을 줍니까?
- 답: 영생은 타락한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며, 곧 새로운 도성인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살며 그분을 즐거워하게 되리라는 사실을 일깨워 줍니다. 우리는 모든 죄에서 완전하고 영원히 해방되어 새롭게 회복된 창조 세계에서 새롭게 회복된 몸을 입고 살게 될 것입니다.
영생이 영원한 삶을 말한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예로부터 유한한 존재인 인간은 영생을 꿈꿔왔습니다. 물질의 기원을 말하며, 사변적으로 영원의 세계를 갈망하며 철학적으로 개념화했습니다. 그것이 사상을 넘어 종교로까지 이어졌고, 그 관념 속에만 있는 것을 현실로 구현해 내고자 무던히 노력해 왔습니다.
사람들은 언제부터 영원을 꿈꾸며 살았을까요? 역사적으로 볼 때는, 고대 문명사회 때부터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학인 ‘길가메시 서사시’나 고대 이집트 종교 속에서도, 그리고 중국의 진시황, 그리고 그 유명한 알렉산더 대왕까지도 모두 불사의 삶, 즉 영생을 꿈꾸고 그것을 찾고자 온갖 노력을 쏟았다는 전설들이 있습니다. 이런 노력들이 몇몇 유명인들을 통해 알게 되었지만, 인류는 고대 사회뿐만 아니라 중세에도, 아니 현재에도 그 영생을 갈망하며 온갖 노력들을 다 해오고 있습니다. 연금술의 발달이 바로 그것을 증명합니다. 또, 현대에는 노화 연구와 냉동기술의 발전, 이식수술, 유전자 편집, 마인드 업로딩(인간의 뇌를 디지털 매체로 저장), 이와 함께 인공지능과 로봇공학 등, 이런 의학과 과학기술의 발전 목적도 바로, 영원히 사는 삶에 맞춰져 있습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영생이, 모든 인류가 갈망하는 시간적으로 오래 사는 것을 넘어 죽지 않고 사는 영원한 삶과 같은 개념을 말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천국을 가고자 고대하는 것이 단지 죽지 않고 살수 있기 때문에 가는 걸까요? 그렇다면, 영원히 산다는 유익이 무엇인가요? 영원히 사는 것이 지금과는 상관없이 죽은 후에 누리는 것일까요? 조금만 생각해보면, 우리는 영생에 대해 수많은 질문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런데 이런 질문들을 하면 할수록, 그토록 사모하고, 그토록 익숙한 영생, 그 영생에 대해 잘 모르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익숙한데 모른다? 사모하는데 뭘 사모하는지 아는 것이 없다? 너무 아이러니합니다.
성경에 한글로 ‘영생’이란 단어가 52번이 나옵니다. 영원히, 영원토록 이란 단어로 찾아보면 이루 말할 수 없이 훨씬 많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 중에 영생이란 무엇이다라고 설명하는 말씀은 딱 한 곳에서만 나옵니다. 그것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이 말씀은, 영생은 단순히 영원히 사는 것만이 아님을 말씀해 줍니다. 오히려 영생은 시간의 의미보다, 관계의 의미를 더 명확히 드러내 줍니다. 천국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천국에서 영원히 누구와 함께 지내는지가 더 중요함을 가르쳐 줍니다. 그리고 영생은 내세에만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도 누릴 수 있는 것이며, 이미 누리고 있음을 가르쳐 줍니다.
영생의 진정한 필수요소는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그분을 알고, 그분과 함께 영원토록 지내는 것, 그것이 우리가 바라는 진정한 영원한 삶의 정수입니다. 인류가 그토록 쫓는 영원한 삶은, 그리스도인이 쫓는 영원한 삶과 확연히 구분됩니다. 우리의 바라는 영생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지성의 영역을 넘어 전인적으로 체험하고 동감하고 교류함을 통해 얻고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