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속에 확장되는 하나님 나라’를 누린 성도가 ‘삶으로 고백하는 하나님 나라’로 나아가기까지는 필요한 것이 하나가 있습니다. 삶 속에 확장되는 하나님 나라로 인해 내 안에 하나님의 기쁨,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누린다고 저절로 삶으로 고백하는 하나님 나라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 누리는 하나님의 은혜는 나의 삶의 행동을 통해 고백의 자리로 나아가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섬기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섬김이 없이는 영적 삶의 능력이 내 안에서 밖으로 나갈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의 사명을 마치시고 하나님 아버지께 돌아가실 때가 되신 줄 아셨습니다. 그래서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요한은 평가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은 그들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의 모습을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예수님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에게만 갇혀 있는 상태가 되면, 여전히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세상적 사고에 갇혀 살아가게 됩니다. 제자들이 그랬습니다. 예수님께서 발을 씻기시며 본을 보여주셨어도 제자들은 여전히 누가 더 큰 자인가를 두고 논쟁을 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섬긴다고 할 때 자신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디에 있는지, 내가 무엇을 하는지, 이것은 늘 우리를 규정하는 단어들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묶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를 이끌어 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섬기는 자리에서 우리가 이것을 내려놓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과 먼저 싸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기적인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의도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의도적으로 살지 않으면 우리의 본성이 우리를 이끌어 가기 때문입니다. 의도적으로 섬겨야 합니다. 의도적으로 봉사해야 합니다. 의도적으로 다른 사람을 생각해야 합니다. 의도적으로 남을 섬기는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더 나아가 우리가 섬기려고 할 때 불편합니다. 그러나 그 불편함을 감수해야 합니다. 무슨 조건이 되면 섬기겠다고, 어떤 상황이 되면 섬기겠다고, 어떤 환경이 되면 섬기겠다고, 무엇을 하고 나면 섬기겠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섬기려고 할 때, 불편하기 때문에 하는 말들입니다. 우리가 남을 섬긴다는 것은 불편합니다. 힘듭니다. 봉사할 때 불편합니다. 힘듭니다. 사마리아 사람도 자신의 여행 계획이 있지 않습니까? 시간이 남아돌아 여유를 부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마리아 사람도 빨리 그 광야를 벗어나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는 그 모든 불편함을 감수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섬김은 그때가 언제이든 필요한 시간에 섬겨야 합니다. 예수님은 3절에 보면, ‘저녁 먹는 중에’라고 시간을 설명합니다.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 시작하십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저녁 먹는 중에’라는 이 시간은 최후의 만찬 중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이제 곧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기 바로 전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기 바로 전입니다. 이제 곧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끌려갈 것입니다. 이제 곧 예수님은 고난으로 들어가실 것입니다. 채찍에 맞으시고 가시 면류관을 쓰시며 조롱과 멸시를 받으실 것입니다. 이제 곧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실 것입니다. 그런 어려운 시간에, 그런 절박한 시간에, 그런 고통의 시간에, 예수님은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