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성숙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나에 대하여,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우리는 무엇을 믿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먼저, 예수님에 대하여 우리가 믿어야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로잡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잡으심으로 나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사로잡고 계심으로 내가 믿음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또한, 나에 대하여 무엇을 믿어야 하겠습니까? 12절에서 사도 바울은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만남으로 인해 자신의 모든 삶이 다 변화된 것이 아니라 여전히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과정에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지금 바울의 상태는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라고 고백하는 상태를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13절에서 먼저, 우리 자신이 미성숙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으로 시작하라고 말합니다.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이 고백이 우리의 삶에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내가 주님이 더 필요한 사람임을 인정할 때 예수님을 닮아갈 수 있습니다.
이처럼 자신을 제대로 알게 된 성숙한 성도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어떤 태도를 보이며, 어떤 도전을 할 것인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찰스 스윈돌 목사는 ‘인생의 10%는 내게 일어난 일이다. 그러나 나머지 90%는 내가 그 일에 어떻게 반응했느냐이다.’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태도라고 합니다.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은 구원을 받은 사실보다 구원받은 사람의 태도입니다. 구원을 받았다면 삶의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바울은 구원받은 삶을 살아가는 성도는 어떤 태도를 보이고 살아야 하는가를 분명하게 소개합니다. 14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신 그 부르심의 상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목적지에 도달하면 주님 앞에 서게 될 것을 확신하며 사는 것입니다. 15절에 보면, 성숙한 사람은 다른 엉뚱한 소리, 다른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태도를 보이고 달려갑니다. 그리고 16절에 내가 지금 어떤 단계에 있던지 그 단계에 맞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단계가 변했다고 해서 내 행동이나 삶이 변질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믿고 의지하는 태도는 변함이 없습니다. 언제나 같은 믿음의 방식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은 반드시 결승점에 도달해야 합니다. 또한, 동시에 그리스도의 적들도 종말에 결승점에 도달하지만, 그들은 분명 다른 결과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17절부터 21절까지 사도 바울은 두 부류의 사람이 결승점에 도달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한 부류는 하늘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이고, 다른 한 부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사람들, 곧 그리스도의 적들입니다. 거짓 교사들은 여전히 율법과 할례를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주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무력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처럼 거짓 교사들, 그리스도의 적들은 자기의 유익만을 구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이 맞이할 마지막을 19절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나님을 섬기기보다 자기 배가 원하는 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수치스러운 일을 하고서도 오히려 자랑으로 여깁니다. 오직 세상일에만 몰두하는 자들입니다. 자기의 유익만 구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늘의 시민권을 분명히 붙들고 가는 사람들이 맞을 마지막은 분명합니다. 예수님이 바꾸시는 삶입니다. 예수님이 이끄시는 삶입니다. 예수님이 다스리시는 삶입니다. 주님은 주님의 능력으로 우리를 변화시키심을 믿는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