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박감. 압박감은 신체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위협을 받아 눌리는 상태를 말합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크고 작은 일들로 우린 압박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누구에게나 직면하는 당연한 것인 줄 알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최근 들어, 여러 매체를 통해 그 압박감을 이겨내고 돌파해 나갈 수 있도록 안내해주는 강연이나 도서나 정보들이 넘쳐납니다. 한 마디로, 인간학 연구들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생리학적 연구로 근본적인 인류학에서 유전학을 넘어 뇌과학 분야까지 활발히 연구되어 성과를 이루고 있습니다. 아울러 인간학은 근대에 와서 실천적인 학문도 활발히 연구되는데, 그 대표적인 분야가 심리학입니다.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큰 영향과 지침을 주는 학문으로 자리잡아가고 있습니다. 인간의 행동과 심리과정을 과학적으로 연구하여 삶의 질을 높여 행복을 선사해 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우린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압박감으로부터 벗어난 삶을 살 수 있을까?”, “압박감이 사라지면, 인간은 과연 행복한가?”
기독교에서는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 그러기에 스스로 온전해 질 수 없고, 개선될 수 없다는 입장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인간 내부에서 찾아 얻는 것이 아니라 외부, 즉 하나님만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신학과 인간학, 특히 심리학과의 큰 차이점을 이룹니다. 과학적으로 인간을 연구해도, 인간에게서 근원적인 해결책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성경의 인물들이 절규하며 외치는 고백이 있습니다. “여호와여! 나를 구원하소서”(시 6:4) 이처럼 성경 곳곳에서 ‘하나님만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다’고 외칩니다.
예수님은 삶에 지쳐 허덕이며 살아가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이 말씀은 압박감에 시달려 갈피를 잡지 못하고 살아가는 지친 영혼들에게 해갈이 되는 말씀입니다. 넓은 품으로 우리가 어떠하든지 있는 모습 그대로 예수님께 안기면 꼭 안아주시면서 토닥여주실 것만 같은 따사로운 상상을 하게 만드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것만 우리에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 11:29) 쉬라 하시면서 멍에를 메라? 심지어 쉬려면 배우라? 표면적으로만 읽으면,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자칫 또 다른 압박감을 씌워주시는 것 같이 여겨집니다. 왜냐하면 멍에라는 단어가 결코 긍정적으로 읽혀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멍에, 멍에는 씌워지는 대상에게는 구속하고 억압하는 도구이지만, 씌우는 대상은 그릇된 길로 엇나가지 않게 하는 도구로서 바르게 지도할 수 있는 유용한 도구가 됩니다. 바로, 예수님은 이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에게서는 선한 것이 나올 수 없기에, 선하신 하나님께 인도받도록 우리를 지도하고 이끄시기 위해 멍에를 메우시는 것입니다.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 11:30) 우리는 내 인생을 내 스스로 짊어지고 허덕이며 살아갑니다. 인간 내면에서 결코 선한 것이 나올 수 없는 존재이면서도, 인본주의적인 사고에 사로잡혀 성공과 실패를 전적으로 내 탓으로 여기며 모든 책임을 다 지고 살아갑니다. 끊임없이 심리학에서 주는 실제적인 가르침으로, 압박으로부터 벗어나려고 압박감에 시달립니다.
그런 인생이 과연 행복할까요? 열심히 하면 그 압박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요? 그래서 우리 삶이 나아졌나요?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7)는 사실을 말입니다. 우리 주님만이 우리를 구원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