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지 않는 사람들과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면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나한테 보여줘, 그럼 내가 믿을께! 증거를 대봐.”라고 말하는 것을 들어본 경험이 있으실 것입니다. “나는 내 눈으로 보지 않고는, 확실한 증거 없이는 믿을 수 없다”라고 사람들은 말을 합니다. 그 사람들에게 여러분은 어떤 증거를 보여주셨나요? 여러분의 대답은 그 사람을 만족시키셨나요? 만약 대답을 못 하셨다면,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무신론자에게는 어떻게 복음을 전해야 할까요?
신학자들뿐만 아니라 많은 학자는 이 질문의 대답을 연구해왔고, 특별히 종교철학 분야에서는 추론과 관찰을 통해서 인격적인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했습니다. 우주론적 논증, 목적론적 논증, 존재론적 논증 그리고 도덕론적 논증을 통해 하나님을 증명하려 했습니다. 오늘은 간단하게 그 논증들에 관하여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우주론적 논증
첫 번째 우주론적 논증은 우주 만물의 움직임과 변화는 그 최초의 원인자를 요구한다는 전제에서 시작하여 우주 만물의 제일 원인을 하나님으로 보는 입장을 말합니다. 이런 우주론적 논증의 대표적인 주창자는 토마스 아퀴나스를 들 수 있습니다.
목적론적 논증
다음은 목적론적 논증인데, 자연 세계의 질서와 규칙성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 배후에 그것을 설계한 존재가 있음을 말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우주 만물을 설계하고 그것에 목적과 질서를 부여한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입장입니다. 영국의 윌리엄 팔리가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존재론적 논증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다’라는 개념의 정의로부터 하나님의 존재가 논리적으로 자연스럽게 도출 된다는 입장도 있는데, 이것이 존재론적 논증입니다. 중세 신학자 안셀름의 주장으로 그는 “하나님은 그분보다 더 큰 존재를 생각할 수 없는 분”이라고 정의했습니다. 그리고 이 정의로부터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존재를 증명하려는 시도라기보다는 자신이 만난 하나님에 대한 개인적 신앙고백으로 받아들일 때 더 의미가 있는 방법입니다.
도덕론적 논증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되 도덕론적으로도 논증하려 시도했습니다. 인간의 마음속에 보편적으로 심겨진 도덕성이 있음을 전제하고, 이 도덕성의 근원으로서 하나님의 존재가 요구된다는 주장입니다. 대표적인 학자로는 C.S. 루이스를 들 수 있습니다.
지면상 4가지의 논증들에 관하여 간단하게 이야기해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방법들에 앞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존재는 증명의 대상이라기보다는 믿음의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말씀합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세계와 아직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은 소망의 세계를 보고 확인하도록 해줍니다. 그렇기에 믿음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는 영적인 눈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눈에 보이시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 하나님은 존재하시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은 공기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공기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의 눈에 그 넓은 우주가 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우주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도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지만, 많은 것들을 믿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공기가 존재한다고 굳건히 믿기에 숨을 쉬지 못할까 걱정하지 않습니다. 중력이 내 손에 잡히지 않지만 우리가 서지 못할까봐 노심초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볼 수 없고 보지 못하는 부분이 훨씬 많다는 것과 우리가 들을 수 없고 듣지 못하는 부분이 훨씬 많다는 것을 깨닫고 우리 감각 기능의 한계를 깨닫기 시작할 때, 우리는 믿음의 눈을 뜨게 됩니다. 반대로 한계를 가진 우리의 눈과 감각으로 신을 보고 증명해 낸다면, 그 신을 참된 신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우리 눈으로 다 볼 수 없는 우주를 지으신, 우주보다 더 크신 분이시기에 하나님을 보는 눈은 반드시 믿음의 눈이어야 합니다. 선창의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증명해내고 싶으십니까? 육신의 눈이 아니라 믿음의 눈을 뜨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