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하나님을 이야기할 때 흔히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면서 어떻게 사람에게 그렇게 심한 벌을 내릴 수 있는지? 정말 사랑의 하나님이신지?를 묻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의 죄는 정말 그렇게 심각한 것일까요?

이 문제를 논하기에 앞서 우리는 죄가 무엇인지에 관해 살펴보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인식하는 죄의 정의는 법을 어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어기면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이고 국가의 법이면 국가에 죄를 짓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렇기에 법정에서도 그것이 위법한지를 논하고 그것의 경중에 따라 형벌을 구형합니다. 그러나 죄는 더 근원적인 것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법을 어기는 것은 죄가 드러나는 현상에 불과합니다. 법을 어기기 전에 그 법을 세우신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반역의 형태가 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일은 단순히 에덴동산에서 그들이 살다가 범한 실수가 아닙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 왕국의 백성으로서 에덴동산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이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것은 이미 그런 마음을 품은 것만으로도 하나님에 대한 반역의 시작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반역하고자 하는 마음 때문에 결국에는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과 법을 어기게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악과를 따먹은 행위는 그저 과일을 따먹었다 그저 실수에 불과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 행위는 아담과 하와가 지을 수 있는 최고의 죄악 즉 하나님의 왕권과 절대적인 권위에 도전하는 반역죄를 범한 것입니다. 통치자이신 하나님께 대항하는 반역죄입니다.

인간의 역사에서도 한번 생각해 봅시다. 반역죄라는 것은 그 나라와 통치권을 전복시키겠다는 것이며 그 나라를 무너뜨리려고 하는 시도입니다. 그렇기에 반역죄를 지은 사람들을 용서한 왕이나 왕조는 없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는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키는 큰 범죄였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진노는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과한 형벌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랑의 하나님이신 것을 창세기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진노하셨지만, 진노 중에도 그들을 향해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비록 영적으로 하나님과 분리되어 죽은 상태가 되었지만, 육체적으로는 완전한 멸망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을 바로 지옥으로 던져넣지도 않으셨습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여자의 후손이 와서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시며 장차 인류를 죄악에서 구원한 메시아를 보내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것을 보면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변함없는 긍휼과 자비를 발견하게 됩니다. 죄 아래 신음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약속을 통해 영원한 소망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관대하심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인간은 어떤 존재입니까? 인간은 기본적으로 교만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주인 되심과 통치자 되심과 왕이 되심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보면 선악과를 만드신 하나님이 마치 폭군처럼 느껴지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교만과 분노에서 나오는 잘못된 생각 때문입니다. 창세기 1장 28절과 2장 17절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넘치는 사랑과 은혜와 관대함으로 대하고 인격적으로 대해주시면서 그들의 자유와 선택권을 존중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성품과 일관된 모습만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왕권에 도전하며 반역과 반란을 일으켰을 때도 아담과 하와를 향한 사랑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수치를 가려주시기 위해 짐승의 피를 흘려 가죽 옷을 지어 입히신 것을 보십시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