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절에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다 마치셨다.’라고 시작합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연결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여기에 ‘다’라는 글자가 더 들어가 있습니다. 그동안 해 오셨던 모든 말씀, 모든 가르침을 다 마치셨다는 뜻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이런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것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 길로 예수님은 직접 들어가신 것입니다. 놀라운 천국의 삶, 회복된 에덴동산의 삶을 살아가려면, 현재의 삶에서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것이 있는데 바로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통과해야 한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이 우리 죄를 지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듯이 우리가 버려야 할 것을, 죽어야 할 것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나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나의 인간적인 욕망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나만 생각하고, 나만을 위하는 이기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내 육신만의 안락함이나 안전함도 때로는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의 삶은 우리 자신의 욕망이 이루어지는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곳은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는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3절부터 보면,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이지만, 전혀 다른 생각을 하며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3절에 ‘그 때에’라고 시작합니다. 그 때에 그들은 대제사장 관정에 모였습니다. 이곳에서 정치적인 회의를 하려는 것입니다. 그들이 택한 방식은 4절에 보면, ‘예수를 흉계로 잡아 죽이려고 의논’하였습니다. 흉계는 방법이고, 잡아 죽이려는 것은 목표입니다. 흉계라는 말은 거짓말입니다. 속임수입니다. 간계를 꾸미는 것입니다. 교활함으로 빌미를 만들려는 것입니다. 남의 눈을 피해 몰래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대제사장들은 말합니다. ‘민란이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하지 말자.’ 사람들을 선동시켜 놓고 정작 자기들은 뒤로 빠지겠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걸려든 사람이 하나 있습니다. 제자 중 가룟 유다가 대제사장에게 가서 은 30에 예수님을 넘겨주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였습니까? 왜 그렇게 살았습니까? 그들은 십자가를 아직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십자가가 필요 없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십자가가 어리석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아니 십자가가 없어도 내가 그것보다 멋진 삶을 살 수 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렇게 이야기를 마무리하지 않으시고, 사람들이 다 그렇게 살지는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 땅에 살지만, 하나님 나라를 풍성하게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게 바로 향유 옥합을 깨트린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이 여인을 칭찬합니다.
마 26:1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이것보다 귀한 남김이 어디 있습니까? 예수님의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이 여인의 행한 일도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그렇게 하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를 볼 수 있고, 그 십자가로 나아갈 수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누리며 충분히 이 땅에서도 기억되는 사람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이 여인을 가장 차갑게 대한 사람이 바로 제자들입니다. 이런 제자들이 어떻게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세워질 수 있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과할 때입니다. 십자가를 지나갈 때 부활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여전히 세상적 관점에서 우리의 삶을 정의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