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각이 달랐습니다. (5-8)
창 6: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당시 사람들이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하였다고 말합니다. 그들 속에는 악한 것들을 꾸미고, 악한 것들을 하려고 하고, 악한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는 것입니다. 생각의 자리에서 악이 가득하였습니다. 이것이 당시 사회의 모습이었습니다. 어느 정도였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땅 위에 사람을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실 지경이 되었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악해지니까 하나님의 마음에 근심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환경 가운데서 노아를 소개할 때 8절에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창 6:8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공동번역으로 보면, ‘그러나 노아만은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그렇게 하였을까요? 그것은 바로 노아의 생각이 당시 사람들의 생각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환경이 달랐기 때문이 아닙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 즉 마음으로 품고 그 품은 것을 생각하고, 생각한 것을 표현하는 방식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마음에서 나오는 생각이 달랐습니다.
- 선택이 달랐습니다. (9-12)
12절에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함이었더라.’라고 말합니다. 다른 번역에 보면, ‘사람들이 하는 일이 땅 위에 냄새를 피우고 있었다.’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는 일, 혈육 있는 자의 행위는 사람들의 행동을 말합니다. 사람들의 행동은 사람들이 선택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선택한 것은 부정한 것, 부패한 것, 냄새를 피우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어떠했습니까? 9절에 보면,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것을 공동번역에 보면, 하나님을 모시고 살았다고 번역합니다. 하나님을 모시고 살았다는 것은 하나님을 선택했다는 말입니다. 노아는 세상을, 그가 살아가던 삶의 환경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을 선택하였습니다. 동행했다는 말은 같이 걸어갔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동행할 때 그는 의인이 될 수 있었고, 완전한 자로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인내가 달랐습니다. (13~)
믿음은 인내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인내와의 싸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과 인내는 상호작용을 합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인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인내할 줄 아는 사람은 믿음으로 삽니다. 노아의 삶에서 볼 수 있는 중요한 것 하나는 바로 인내입니다. 22절에 보면, ‘노아가 이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라고 하였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부 준행하였다는 것입니다. 7:5에도 똑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노아가 가졌던 행동의 패턴입니다. 노아는 시간이 얼마가 걸리던 그것이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힘이 드는가? 그것이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습니다. 다 준행하는 것이 그의 목표였고, 그의 삶의 도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