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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하지?”, “어떻게 할래?” 서로 바라보며, 막막한 심정을 죄다 토로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에게는 며칠 사이에 너무 큰일들이 쓰나미(tsunami)처럼 몰려 왔습니다. 자신들과 줄곧 함께 하실 줄만 알았던 예수님께서 잡혀 가시더니 끝내 십자가 처형을 당하시지를 않나, 낙심한 마음을 쓸어내리며 애써 장사를 지냈더니 시신은 사라지지를 않나, 심지어 죽은 줄 알았던 예수님이 홀연 나타나 부활하신 몸을 내보이시는 일까지, 제자들에게는 상상할 수도 없는 너무 큰일들의 연속입니다. 이들은 너무 혼란스러웠을 것입니다. 더구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처럼 다시 함께 하셨더라면 덜 혼란스럽고 불안했을 터인데, 그마저도 아니니 막막하기 그지없었을 것입니다. 이때 베드로가 말합니다. “나는 물고기나 잡으러 가야겠다.” 베드로의 말에 너도나도 동조합니다. 끝끝내 갈릴리 호수 서남쪽 디베랴로 가서 어부생활을 합니다. 함께한 사람은 일곱 명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디베랴에 나타나셨습니다. 밤새 물고기를 하나도 낚지 못한 제자들에게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은 그분이 예수님임을 알아채고 베드로에게 말합니다. 베드로는 요한의 말을 듣자, 바로 바다에 뛰어듭니다.
예수님과 함께 제자들은 아침식사를 합니다. 예수님께서 손수 차려주십니다. 식사를 마치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묻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것도 세 번이나. 예수님께선 다른 제자들이 없는 틈에 물은 것일까요? 아니면 모두가 함께한 자리에게 물으신 것일까요? 베드로에게 하신 질문에 어떤 의도가 담겨있는 것 같습니다. 동일한 질문을 받은 베드로는 세 번째 질문엔 말문이 막힙니다.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하고, 고민을 합니다.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예수님은 왜 베드로에게 세 번씩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것일까요? 예수님을 향한 베드로의 마음은 줄곧 한 결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대답을 하죠.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십니다.” 베드로에게는 십자가 사건 전이나 후나 상관없이, 모두 주님 사랑하는 마음은 매한가지였습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지금의 베드로에겐 ‘세 번’이라는 의미가 남다르다는 것 뿐.
예수님께서 디베랴 호수에 나타나신 이유가, 어쩌면 베드로를 꼭 만나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세 번의 질문과 함께 세 번의 당부. 이는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때, 닭 울기 전에 세 번 부인했던 베드로에게 찾아오셔서, 여생동안 폐부 찔리듯 남모를 마음의 응어리를 지고 살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찾아오셔서, 베드로의 마음을 보듬으시며, 다시금 ‘사람 낚는 자’로 살도록 북돋아 주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베드로는 재차 예수님께로부터 ‘나를 따르라’는 부름을 받고, 예전과 다른 행보로 여생을 사명자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베드로의 연약한 모습이 보입니다. 자신의 모진 실수를 탕감 받은 그 자리에서, 다시 우쭐대듯 “주님! 이 사람은 어찌 되나요?”라고 예수님께 묻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질문의 속내를 읽으셨습니다. 그래서 대답하십니다.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이 모습을 통해, 베드로에게 있는 어린아이 같은 모습을 읽어봅니다. 어른들이 너그러운 마음으로 ‘우쭈쭈’하며 아이를 치켜세워주니, 자신이 뭐라도 된 양 우쭐거리는 모습 말입니다. 비단 베드로에게만 있는 모습이 아니지요. 주님을 사랑한다면서, 주를 위해 따르겠다면서, 그럼에도 주님을 사랑하기보다 자신을 사랑하는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몸은 장성하였지만 아직 내면은 덜 성장하여, 자신을 진지하게 들여다보기보다 타인과 비교하며 자신의 가치를 자랑하려는 연약한 근성, 베드로의 이런 근성을 통해 우리 내면에 도사리는 덜 성숙한 치부가 투영됩니다.
사랑한다면, 연인이 사랑하는 것처럼, 아니 연인이 사랑하는 것보다 더 주님을 사랑해야하지 않을까요? 사랑한다면, 연인의 사랑보다 더 성숙한 모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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