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음이 반응할 때 확장됩니다.
본문에 보면, ‘들으라’와 같이 듣는다는 단어가 8번 등장합니다. 여기서 듣는다는 말은 구약에서는 샤마라는 단어로 사용되는 ‘이스라엘아 들으라!’로 시작되는 신명기 6장과 같은 말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말하는 듣는다는 것은 귀로만, 소리로만 듣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소리가 마음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귀에만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 말씀의 씨가 뿌려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마음이 사람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마음속에 분노가 가득할 때 누가 건드리면 화가 납니다. 분노가 폭발하게 됩니다. 이처럼 마음에 문제가 있으면, 그 마음에 있는 대로 표현됩니다. 또한, 동시에 마음이 완고하면, 말씀이 들어가지 못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정돈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마음에 말씀이 임해야 합니다. 마음 안에 임한 말씀이 나를 바꾸고, 내 삶을 바꾸어 나가는 기초가 될 때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 나라는 확장됩니다.
- 나를 극복할 때 확장됩니다.
2절에 보면, 예수께서 여러 가지를 비유로 가르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왜 비유로 가르치셨을까요? 10절에서 12절을 보면, 비유는 비유를 듣고 감동을 하고 이해하는 사람과 다른 한 편으로는 비유의 내용에 마음을 닫는 사람으로 구분하려는 목적이 있습니다. 비유는 원래 어떤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잘 알지 못하는 것을 알아듣기 쉽게 도와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비유를 듣고 마음을 닫는 사람에게는 비유는 이해할 수 없는 수수께끼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시면서 13절에 보면, ‘너희가 이 비유를 알지 못할진대 어떻게 모든 비유를 알겠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제자들이 아직 자신들의 고집 속에 머물러 있는 상태임을 말합니다. 그리고 아직 예수님의 말씀을 다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였습니다. 이것을 극복하게 하시려는 것이 예수님의 의도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나 자신의 생각과 습관과 법과 규칙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되면, 예수님이 원하시는 방식으로 변화시켜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 깊은 말씀이 주시는 풍성한 자리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 나라는 확장됩니다.
- 결실을 향해 갈 때 확장됩니다.
진짜 성장, 진짜 확장은 내가 배운 것, 내가 가진 것을 사용할 수 있을 때입니다. 다시 말하면, 들어오는 것에서 머물지 않고 들어온 것이 나가는 것으로 확장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단지 말씀을 듣는 자가 아니라 말씀을 내 삶 속에 실천하여 열매를 맺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말씀이 뿌리를 내리는 것에서 머물지 말아야 합니다. 뿌리에서 줄기가 올라오고 마침내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 열매가 삼십 배이든, 육십 배이든, 백 배이든 형편에 따라, 주신 은혜에 따라 다르겠지만, 열매를 맺는 것은 같은 것입니다. 겨자씨와 겨자 나무는 전혀 다릅니다. 겨자씨는 사람들에게 그늘을 만들어 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겨자 나무는 그늘을 만들어 주어 쉴 수 있게 해 줍니다. 겨자씨는 새들이 와서 앉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겨자 나무는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이게 됩니다. 그렇다면, 열매는 그저 맺힙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 씨를 수용하고 받아들여 자랄 수 있는 환경이 되어야 합니다. 좋은 밭이 되어 품고 집중하고, 수고하고, 인내할 때 맺히게 됩니다. 결실을 향해 간다는 것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내가 가진 것을 밖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내 안에 거하여 싹이 나고 의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말씀대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돌보고, 가난한 사람을 향하여 손을 내밀고, 병든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길잃은 사람을 향해 다가가고, 소외된 사람에게 손을 내밀어 주고, 약하고 무력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곳에 다가가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