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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얼마 전에 레스토랑에서 노키즈 존이라고 하여 아이들이 들어오지 못하는 레스토랑이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여러 명 있는 경우에 가족이 식당에 간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아이들과 함께 식당에 가면 그 식당이 내 아이들을 참는 곳인지, 포용하는 곳인지를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식탁에 앉아 견딜 수 있는 시간은 그리 오래되지 못합니다. 음식이 조금만 늦어도 식탁에서는 무엇인가가 떨어지는 소리부터 물을 엎어 버리거나 아이들이 테이블에서 이동하기 시작합니다. 이런 경우 종업원들은 두 종류입니다. 하나는 종업원들의 얼굴은 굳어 있지만 참는 경우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아이들이니까 할 수 없지 않으냐고 말하며 용납하는 경우입니다. 그런 경우 부모들이라면 어떤 식당을 다시 찾게 될까요? 아이들의 행동을 그냥 참아주는 식당보다는 포용하는 식당을 다시 찾게 됩니다.

 

교회는 어떻습니까? 어린이를 참아주는 교회와 포용하는 교회, 두 종류의 교회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교회는 아이들에게 무례하게 대하지 않습니다. 노 키즈 존이라는 간판도 붙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방문하는 가족들은 교회가 아이들을 참아만 주는지, 아니면 포용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어린이를 환영하는 교회, 어린이를 포용할 수 있는 교회를 찾는 것은 부모의 입장에서 너무나 당연하지 않을까요?

 

아이들을 참는다는 것은 그 존재보다는 소음을 중시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이들은 소리를 지릅니다. 아이들은 울기도 합니다. 아이들은 친구들과 이야기할 때 큰 소리로 떠들며 이야기합니다. 때로는 비명을 지르기도 하고, 고함을 치기도 합니다. 자기들의 몸짓을 최대한 크게 하여 목소리와 함께 대화하기도 합니다. 그럴 때 그 소리가 거슬리기 때문에 힘들다면 참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원래 그렇게 존재하는 것이야 라고 인정하며 받아들이는 것이 포용입니다. 문제는 교회가 어디에 초점을 두고 있느냐에 따라 이런 아이들을 어떻게 대하느냐가 달라집니다. 교회에서 일정 연령이 되지 않는 아이들은 시끄러우니까 예배에 참석할 수 없다고 규정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얼마나 말이 안 되는 이야기이겠습니까?

그러나 사실 교회학교 현장에서 아이들을 포용하는 것이 머리로는 쉽지만, 행동으로 하기가 어려울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현장에서 아이들을 행동으로까지 포용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제자도의 삶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처럼 우리도 어린이들을 포용하고 그들의 삶과 그들의 성장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예수님은 아이들을 초대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0장에서는 예수님은 아이들을 안아주셨습니다. 아이들을 환영하고 포용하는 교회는 예수님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아이들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제자들에게 화를 내십니다. 어린이들을 축복하고 어린이들에게 우선순위를 두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아이들을 참는 교회가 아니라 포용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가정의 중심이 하나님이 되시도록 돕는 곳입니다. 하나님이 주인되시는 가정을 만들어 가는 것이 교회가 추구하는 제자도의 모습입니다. 그러기에 교회에서도 우리는 아이들을 참는 수준이 아닌 그들이 하나님 나라의 주역이 되도록 포용하고 돕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교회학교는 참 중요한 곳입니다. 교회학교는 교사들뿐만 아니라 교회 전체가 함께 세워가는 곳입니다. 교회학교와 가정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와 가정도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어야 합니다.

 

선창교회는 아이들을 참는 교회가 아니라 포용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아이들은 미래입니다. 내일의 주역입니다. 오늘만 있고 내일이 없다면 교회는 이 땅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교회에 나온 아이들을 있는 그대로 포용하고 그들을 세워갈 때 좋은 그리스도의 제자로 세워질 것입니다. 모든 성도가 기도로, 마음으로, 그리고 말과 행동으로 어린이들을 세워갑시다.

 

선창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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