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초등학교에서 용기를 내라고 했더니 학생들이 집에 있는 그릇들을 가지고 왔더랍니다. 이 학생들은 용기를 물건을 담는 그릇으로 착각한 것입니다. 우리가 가져야 할 용기는 물건을 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내일을 담기 위한 굳세고 씩씩한 마음을 말합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인은 두려움 속에 살지 아니하고 용기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두려움이 우리를 지배하게 되면 절대 건강한 모습으로 세워질 수 없습니다. 개인도 그렇지만, 교회도 그렇습니다. 교회가 두려움에 휩싸이면 문제를 풀어가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으로 인해 용기를 얻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막힌 문제를 풀어갈 힘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공급하시는 용기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블레셋 땅의 북쪽에 머물고 있을 때 아말렉 사람들이 다윗이 없는 틈을 타서 시글락을 공격합니다. 마을이 불타고, 젊거나 늙은 여인들은 다 사로잡혀가게 됩니다. 다윗이 다시 시글락으로 돌아와 왔을 때 백성들이 자녀들 때문에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자고 소리를 지릅니다. 그럴 때 다윗은 얼마나 당황했는지 모릅니다. 크게 다급하였으나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다고 하였습니다. 너무나 큰 절망의 상황에서도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으로 인해 용기를 얻고 그 문제를 풀어갈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헐링워스라는 사람은 ‘용기는 두려움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두려움보다 더 중요한 무엇인가가 있다는 판단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흔히 두려움이 없으면 용기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두려움이 없으면 용기를 낼 이유도 없습니다. 사실 우리가 용기를 내라고 할 때는 어려움에 갇혀 두려운 상태에 있을 때 하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단순히 두려움이 없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두려움 속에서 그 두려움에 끌려다니지 아니하고 오히려 그 두려움보다 더 크고 중요한 것을 바라보고 의지함으로 힘을 얻는 것이 용기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 36절과 37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교회에 다닌다고 핍박이 없거나 환난이 없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착각입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교회 다니는데 왜 문제가 일어나느냐고 질문합니다. 교회 다니는데 왜 집안에 문제가 해결이 안 되느냐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다녀도 핍박이 있고, 문제가 있고, 어려움이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 속에서 우리는 넉넉히 이기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엇으로 이깁니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기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믿음의 용기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이고, 그 사랑이 내 안에 여전히 자리하고 있기에 내가 그 사랑을 힘입어 이 문제를 뚫고 나가겠다는 용기입니다. 그 용기가 우리를 문제를 통과하게 하여 주는 힘입니다. 그러기에 용기는 나의 상황이나 문제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시각을 하나님의 부요하심에 두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1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은 무한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인간이 어떻게 전부 판단하겠습니까? 하나님은 무한하신 사랑으로, 그 지혜와 지식으로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 삶의 자리에서 그 하나님을 의지하며 용기를 내야 합니다. 오늘 내 눈에 보이지 않아도 용기를 내십시오. 오늘 내 귀에 들리지 않아도 용기를 내십시오. 주님께 의탁하고 신뢰함으로 내딛는 발걸음이 되십시오. 그럴 때 통과하게 될 것입니다. 이번 사순절을 통해 용기를 내어 걸음을 옮겨가는 선창의 귀한 가족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