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자녀를 교육할 때 성경 말씀으로 가르치라고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자녀들의 삶에 들어가게 될 때 그것을 기초가 되어 성품이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성품은 자기 안에 있는 가치관, 세계관을 그대로 반영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내 안에 어떤 가치관, 세계관을 가지게 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성품이 달라집니다. 어떤 자녀들을 보면 그들의 성품의 기초가 자기 자신의 유익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을 봅니다. 이런 경우 매우 이기적으로 되며, 자연스럽게 주변의 삶과 동떨어진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도 하나님의 성품에 기반하여 일하십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일하심을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성품을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하나님을 표현할 때 어떤 말들을 많이 사용합니까? 사랑의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 용서하시는 하나님과 같이 우리에게 유익이 될 것 같은 표현들을 참 좋아합니다. 내가 기준이 되어 나에게 도움이 되는 하나님의 모습을 기대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하나님의 성품이 있는가 하면 매우 단호하고, 엄격한 하나님의 성품의 잣대가 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진노하시는 하나님, 불의를 기뻐하지 않으시는 하나님과 같은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모습 속에는 양면적인 모습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이것은 양면적인 모습이 아니라 참된 하나님의 성품이 표현되는 방식입니다. 이 두 면이 서로 배치되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 하나님의 특징은 바로 거룩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모습은 끊임없이 성경에 나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십니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도 거룩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우리의 삶에도 적용되어야 합니다. 그러다 보니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자가 되라고 요청하십니다. 신약에서도 하나님은 거룩하신 자인 줄 믿는다는 고백이 나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속성, 하나님의 성품 가운데 중요한 것은 바로 거룩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시다는 것은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고 죄와 타협하지 않으신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처럼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죄를 미워하시고 죄와 타협하지 않으신 결과,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게 되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사람들은 두려워하였습니다. 밤이 맞도록 고기를 잡았지만 잡지 못하고 돌아온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순종할 때 두 배에 잠기게 될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말합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보게 되었을 때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모세도 하나님이 부르실 때 두려워하였습니다. 이사야도 부름을 받을 때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이처럼 성경에 나오는 많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 설 때 두려움으로 나아갔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죄와 죄인들을 미워하십니다. 죄인이 회개하지 않을 때 죄인에게 진노를 내리십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진노가 약 600여 회나 등장합니다. 그리고 신약에서도 25번이나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진노한다고 하면 이성을 잃고 소리를 지르는 것을 상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의 영원한 속성에서 나오는 것이기에 일관되고 확고한 태도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분노입니다. 존 스토트는 악에 의해서만 일어나고 악에 대한 정죄 속에서만 표현되는, 하나님의 계속적이고 확고한 적대이며, 사적인 원한이나 앙갚음이 아니기에, 하나님은 그 적대자에 대해 감소되지 않은 사랑을 동시에 유지하신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죄에 대해 진노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두려워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비칠 때 드러나는 죄에 대하여 하나님은 너무나 싫어하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진노는 의로운 진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 거룩하신 하나님, 죄를 미워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진노하시는 하나님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 삶의 잣대가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거룩하신 하나님께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