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은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극명하게 다른 두 세계관을 소개합니다. 하나는 세상에 속한 삶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 속한 삶입니다. 사도 요한은 15절부터 17절까지는 세상의 세계관을 소개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가지고 살아가는 삶의 기준들입니다. 그것을 가장 잘 말해 주는 것이 16절입니다.
요일 2: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세상적 세계관의 핵심은 세 가지입니다. 하나는 육신의 정욕입니다. 우리 육체가 원하는 대로 사는 것입니다. 육체가 곧 내 삶의 판단의 기준입니다. 두 번째는, 안목의 정욕입니다. 안목은 눈을 통해서 추구하게 되는 욕망입니다. 눈은 여러 감각 기관 가운데 쾌락을 탐지하는 가장 첫 번째 통로라고 말합니다. 세 번째는, 이생의 자랑입니다. 이생의 자랑은 다른 번역에 보면 세상 살림에 대한 자랑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세상적 소유에 대한 자랑입니다.
요한은 이런 것은 세상의 세계관이라고 말합니다. 세상이 추구하는 가치입니다. 이런 가치를 사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런 가치로 살아가는 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요일 2:17 이 세상도 사라지고, 이 세상의 욕망도 사라지지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새번역)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근본으로 삼고 살아야 하겠습니까? 사도 요한은 자녀들아, 아비들아, 청년들아, 아이들아, 이런 호칭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쓴 것은, 대상마다 특별한 삶의 지침을 주기 위해 구분하여 불렀다기보다는 모든 사람을 향하여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들이 추구해야 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첫 번째는 죄가 사함을 받았다는 확신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출발점은 죄 용서함을 받았다는 믿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이미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죄의 용서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우리를 위해 베풀어 주신 놀라운 사건입니다. 그 사건이 나를 위하여 행하신 것임을 믿을 때 우리는 그 십자가에서 이루신 놀라운 의가 우리에게 임하게 됩니다.
두 번째는 악한 자를 이기었다는 확신입니다. 여기서 이기었다는 말은 미래형이 아닙니다. 앞으로 이기게 될 것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오늘 이미 우리는 악한 자를 이기었다, 흉악한 자를 이기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악한 자, 흉악한 자는 누구를 말하겠습니까? 우리가 이겨야 하는 대상은 누구입니까? 여기서 말하고 있는 악한 자라고 지칭되는 것은 바로 사탄입니다. 왜 악한 자입니까? 우리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며, 하나님과 상관없는 죽음으로, 파멸로, 파괴로 우리를 인도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이런 악한 자를 이미 이기었다고 요한은 선포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로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다는 확신입니다. 13절과 14절에서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태초부터 계신 이는 누구십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요한복음 1:1과 요한일서 1:1은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소개합니다.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있다는 확신이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