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는 광야라는 단어가 많이 등장합니다. 어쩌면 성경의 배경 가운데 많은 부분이 광야일 것입니다. 광야라는 말은 사막을 표현합니다. 그런데 사막이라고 할 때 우리가 상상하는 모래가 많이 휘날리는 그런 사막이 아닌 곳이 많습니다. 이스라엘의 광야라는 곳에 가보면 마치 바위처럼 생긴 모래더미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광야는 나무가 없는 곳, 물이 없는 곳, 뜨거운 곳입니다. 외롭고, 막막하고, 목마른 곳이 광야입니다.

오늘 이 시간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삶의 자리를 광야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자유롭게 만나지 못하고, 좁은 공간에 고립되어 있고, 사람과 사람이 서로 일정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어야 하며, 함께 예배하며 서로를 격려하지 못하고, 격려를 받지도 못하는 이 시간이 어쩌면 광야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이 광야에서 제일 힘든 것은 육체일 수도 있지만, 그것보다 마음이 더 힘든 시간입니다. 애굽의 노예로 살아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지휘 아래 애굽을 탈출하여 나온 곳이 바로 광야입니다. 그 광야의 길을 걸어가면서 사람들이 가장 힘들어했던 것이 바로 마음입니다. 그 마음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초적인 원망 소리일 것입니다. “차라리 우리가 이집트 땅 거기 고기 가마 곁에 앉아 배불리 음식을 먹던 그 때에, 누가 우리를 주님의 손에 넘겨 주어서 죽게 했더라면 더 좋을 뻔하였습니다.” 배고픈 것, 고기를 먹고 싶은 것도 지금 이들이 힘들어하는 이유일 수 있지만 더 근원적으로 보면 지금 이들의 마음이 지쳐있고 힘들어하는 것입니다.

 

어느 심리학자가 코로나 시대의 사람들의 마음을 조사한 연구 결과를 듣게 되었습니다. 거기에 보면 사회적 거리 두기와 세계적 펜데믹이 일어났을 때 사람들의 행복지수는 급격하게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신천지의 집단 감염 때는 행복지수가 그리 큰 변화가 없었는데, 세계적 펜데믹이 선언되었을 때 오히려 행복지수가 크게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한 지역에서 일어난 집단 감염은 나와 상관없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지만, 전 세계적으로 퍼져나가고 있다는 선포는 나도 저 사람들처럼 될 수 있겠다는 불안감을 가져다준 것입니다.

또 하나는 인생의 다양한 경험들을 한 50대 이상은 행복감이나 스트레스에 그리 큰 변화를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물론 오르락내리락하기는 했지만, 그 폭이 크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젊은 사람들은 오히려 매우 큰 폭으로 변화하였습니다. 행복감은 낮아지고, 스트레스는 커졌습니다. 거기다가 여성이 남성보다 더 큰 변화를 보였습니다. 며칠 전 신문에서 “여성 덮친 ‘코로나 우울’ 2030 극단선택 늘었다”라는 기사 제목을 보았습니다.

만약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을 비교하여 마음을 조사했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요? 그리스도인이 더 위기에 안정적이고, 스트레스를 잘 이겨내며, 행복을 유지하려는 힘이 강하다고 보십니까? 저는 좀 더 안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는 모퉁잇돌, 반석이 되시는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그리스도인 안에는 분명한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은 마음이 약해져서는 안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도 힘들 때 있고, 아파할 때 있습니다. 저도 마음이 힘들 때가 있습니다. 괜찮습니다. 그러나 아플 때는 아프다고 말할 수 있는 분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 차이입니다. 그분은 우리가 힘들다고 말할 때 우리를 위로하시고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광야에서는 광야의 길을 이겨낼 습관이 필요합니다. 이런 비대면의 시간이나 사회적 거리 두기 시간에 오히려 개인적으로 더 친밀하게 하나님을 경험하고 누리며 나아가는 습관을 지녀야 합니다. 때로는 찬양을 들으면서, 때로는 아프다고, 힘들다고 주님께 말하면서, 때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거기서 일하고 계시는 주님을 누려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