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의 본질은 예배자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예배자 자신을 고백하지 못하고 예배에 나아가는 자는 참된 예배의 기쁨 안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면 예배자의 정체성은 어떤 것입니까? 9절에 보면 세 번이나 예수님의 이름을 말합니다. 예배자의 중요한 정체성은 예수님 안에 있는 자들입니다. 다른 어떤 조건이 예배자로 서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안에 서 있는 자들이 참된 예배를 드리게 됩니다. 세상의 신분이나 학력, 직분이 예배를 드리는 조건이 되지 않습니다. 왜 예수님입니까? 5절에 보면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며, 자기의 피로 우리의 죄에서 해방시켜 주셨고, 우리로 하여금 나라가 되게 하시어 자기 아버지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이 되게 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9절에서 다른 예배자들과의 관계를 말합니다. 예수님을 믿을 뿐 아니라 예수님이 원하시는 자리에 서 있는 자들이 바로 예배를 드리는 자입니다. 10절에는 성령에 감동된 자라고 말합니다. 예배를 드리는 중에 성령에 감동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를 드리기 전에 이미 성령에 감동된 자입니다. 성령에 사로잡혀 있는 자입니다. 그리고 내게 들리는 음성을 알아보려고 돌이키는 자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예배자가 예배하는 대상은 누구입니까?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는 분은 누구십니까?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지금 사도 요한이 보고 있는 예수님은 더 이상 어떤 변화가 필요하신 분이 아닙니다. 완전하신 예수님이십니다. 모든 승리를 누리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이 땅에 오셔서 공생애를 보내시던 예수님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이 아닙니다. 무덤에 머무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을 다 이루시고 완전하신 하나님으로서 승리하신 분이십니다.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셨는지를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모습은 모두가 승리자이신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존재도 예수님과 같지 못합니다. 예수님처럼 완전한 승리를 보여주지 못합니다. 바로 그 예수님께 우리는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배하는 자가 승리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바라보며 예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어떻게 예배하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까? 17절에 보면 ‘그를 뵐 때에’라고 말합니다. 영광스러운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요한은 그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내가 그의 발 앞에 엎어져서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죽은 척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경배한다고 말합니다. 예배는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 앞에 엎드리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목적을 가지고 예수님 앞에 엎드립니다. 어떤 사람은 병을 낫게 해달라는 간절함으로 엎드립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능력을 베풀어 달라고 요청하며 엎드립니다. 혈루병을 앓은 여자는 주님의 옷자락을 만지고 엎드립니다. 야이로가 죽어가는 딸을 위해 자기 집에 오시기를 간청할 때 엎드립니다. 그러나 요한은 어떤 요청이나 간구를 위해 엎드린 것이 아닙니다. 요한은 영광스러운 예수님을 목격하게 되었을 때 그 앞에 엎어져 죽은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아마도 자기도 모르게 엎어졌을지도 모릅니다. 그저 경외하는 두려움으로 엎드리는 것부터 참된 예배가 시작됩니다.
(2019년 7월 14일 김 혁목사 주일설교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