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에는 보는 것을 말할 때 세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견시관(見視觀)입니다. 볼 견(見)은 보기는 보는데 눈을 뜨고 있으니 보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볼 시(視)는 어느 차원에서 보느냐의 문제입니다. 어느 각도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생기는 것이 시각차입니다. 볼 관(觀)은 중심에서 보는 것입니다. 시각적으로 보는 것을 넘어 자세히 응시하면서 뚫어지게 보는 것입니다. 한자 관에는 눈동자가 없습니다. 눈을 감아야 눈 뜨고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등장하는 사두개인들은 제사장 가문에 속한 사두개인들이 귀족으로서 정치를 주도하였습니다. 특별히 이들은 성전과 제사 정결에 관한 한 철저하게 보수적인 견해를 고수하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주요 관심사는 율법에 성문화된 성전 및 제의 규정을 정확하고 철저하게 준행하는 것이었습니다. 구전된 토라를 배격하고, 문서화된 토라를 존중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의 문자적 해석과 적용에 주력하였습니다. 이들은 부활신앙을 믿지 않았습니다. 사후생명을 믿지 않았습니다.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와서 묻습니다. 모세오경에 기록된 수혼법이라고도 하고 계대결혼이라고도하는 문제를 가지고 질문합니다. 사두개인들은 지금 교묘한 질문을 예수님께 하고 있습니다. 이런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은 두 가지를 지적하시며 바리새인의 생각을 바로잡아 가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2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막 12:24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
첫 번째, 너희가 성경도 알지 못한다는 말합니다. 사실 사두개인들은 자신들이 성경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고 자부했습니다. 그들이 믿는 성경은 모세오경입니다. 그 모세오경 속에는 부활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부활은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너희가 모세오경만이라도 제대로 이해했더라면 부활을 부정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모세오경에만 해도 부활이라는 단어는 없어도 이미 부활에 대한 교훈이 나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26절과 27절에서 출애굽기 3:6의 말씀을 인용하여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나실 때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다.’라고 자신을 밝히신 내용입니다. 모세 때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은 이미 죽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하나님이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자의 하나님이시라고 설명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은 지금 죽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지금 대면하고 있는 살아있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모세오경에서도 이미 하나님의 시선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두 번째,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지금 사두개인들이 보고 있는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자기들이 경험하고 있는 인간의 삶에 기초하여 하나님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도 자기들처럼 제한된 삶을 사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한계를 뛰어 넘어 일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25절에서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하나님께서 부활한 자들을 어떻게 대하실지 어떻게 변화시키실지, 어떤 삶을 살게 하실지, 지금 우리가 세세하게 다 알지 못한다하더라도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능력의 하나님이셔서 능히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