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회복이 일어나야 합니다.
12절과 1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시장하셨습니다. 그래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 나무를 통해 열매를 기대하셨습니다. 그런데 잎사귀는 무성한데 잎사귀 외에는 열매가 없었다고 말합니다. 구약에서 이사야나 예레미야, 에스겔과 같은 선지자들은 한 국가의 운명에 대해 하나님의 예언을 전할 때 상징적인 것을 가지고 선포하였습니다. 구약의 몇몇 구절에서 무화과나무는 하나님 앞에서의 이스라엘의 지위를 언급할 때 사용하였습니다. 무화과나무가 사라진다는 것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십니다. 그곳에 들어갔더니 성전 안에서는 물건을 사고팝니다. 그들을 성전에서 내쫓으십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이곳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평가하십니다. 이 장면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의 파멸을 선포하시는 행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다시 오실 그 마지막 때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심판하시는 주님이십니다.
공간의 회복이 일어나야 합니다.
15절에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라고 말합니다. 이때 성전은 이방인의 뜰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여자들이 들어가는 구역, 그리고 이스라엘 남자들이 들어가는 구역, 제사장이 들어가는 구역으로 나뉘게 됩니다. 사람들이 물건을 사고팔고, 돈을 바꾸는 지역은 이방인의 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방인의 뜰에서는 매매하는 것이 자유로웠지만 유대인의 뜰에서는 매매를 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16절에서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락하지 아니하였다’는 것은 성전이 하나의 지름길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이 성전이라는 공간이 원래의 공간으로 회복되기를 선포하고 계신 것입니다. 17절에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였습니다. 만민이라는 말은 모든 민족, 모든 백성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구원 계획은 모든 민족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도 모든 민족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모든 민족 안에 회복되어야 합니다.
예배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무화과나무의 잎이 무성하다는 것은 그 나무가 아직 살아있는 나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정작 기대하는 열매는 보이지 않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종교행위는 거창하게 합니다. 사람들이 종교적 제의에 관심을 가지고 있고, 형식적인 제사를 드립니다. 그러나 정작 그들의 삶에 참된 예배, 하나님을 만나고 누림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있는 눈은 없었던 것입니다. 성전 안에서의 상황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돈을 바꾸고, 왜 비둘기를 팝니까? 왜 짐승들을 팔았습니까? 제사를 드리기 위함입니다. 그들은 편리한 방식을 택하여 멀리서 짐승을 가지고 오거나 성전에 낼 수 있는 돈으로 미리 준비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성전에 와서 그것을 돈으로 구입하였습니다. 형식은 있고, 흉내는 내는데 거기에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참된 헌신이 없는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도전해야 할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파멸을 옮길 수 있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또 하나는 기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