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이야기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는 도중에 세 번의 수난예고 가운데 두 번째 수난예고가 들어있는 장면입니다. 이 본문은 어쩌면 대림절을 시작하는 우리들에게 아기 예수님을 다시 바라보게 만드는 본문이 되기도 합니다. 수난을 향하여 나아가시는 예수님의 출발은 마구간에서 태어나신 것에서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삶은 태어나실 때부터 십자가 위에서 죽으실 때까지 동일한 이야기, 동일한 삶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30절에 예수님이 ‘갈릴리 가운데로 지날새’라고 말합니다. 길에서 일어난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33절과 34절에서도 ‘길에서’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길을 가는 도중에 일어난 사건임을 말합니다. 주님과 함께 제자들은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는 두 가지 길이 존재합니다. 주님의 길과 제자들의 길입니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그것은 ‘명예’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명예라는 것은 어떤 한 사람이 속한 사회에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긍정적인 가치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다른 사람들에 의한 사회적 인정을 말합니다. 그러나 수치는 그 반대되는 말로 공적으로 부인되고 인정받지 못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런 명예와 수치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는 당시 사회 속에서 예수님은 참된 명예가 무엇이고, 수치가 무엇인지를 재정립하십니다. 명예와 수치를 이야기할 때 중요한 개념은 누구로부터 명예를 인정받는가의 문제입니다. 그 당시 사회는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로부터, 다시 말하면 유대인으로부터 인정받고, 배척되는가가 기준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사람들이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준이 되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질문을 하십니다.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그들이 잠잠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길에서 논의한 것은 ‘누가 크냐?’는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크다는 것은 더 위대하다는 비교급입니다. 더 위대하다는 비교는 그들 안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자기들끼리 모여서 누가 더 위대하냐를 재고 있는 것입니다.

첫 번째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참된 명예는 낮아 질 뿐 아니라 낮은 자들을 향한 태도가 달라지는 사람입니다. 사회적으로 지극히 낮은 지위를 갖는 어린아이에 대한 제자의 태도가 곧 예수님께 대한 태도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린아이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영접하면 그 아이는 예수님을 대표하게 되고, 따라서 예수님 자신을 영접하는 것이 됩니다.

두 번째 이야기가 38절에서 41절에 나오고 있습니다. 요한이 이야기합니다. ‘선생님, 어떤 이가 선생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는데, 그가 저희를 따르지 않음으로 그를 못하게 막았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런 그를 향하여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는 그를 금하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이것은 자기 그룹에 속해 있지 않다고 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하는 것을 막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42절에서 50절에서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에 대한 위험에 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작은 자의 믿음을 방해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위험에 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두 종류의 사람으로부터 걸려 넘어지는 경우를 소개합니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 50절에 소금 이야기를 하면서 서로 화목하게 지내라고 말씀하십니다. 첫 장면을 다시 회복시키시는 모습입니다. 왜냐하면 함께 하나님 나라의 명예를 위해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