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절에 보면 예수님은 두아디라교회를 바라보며 책망할 일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이세벨을 용납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세벨은 어떤 사람입니까? 이세벨이란 이름을 들으면 구약에 나오는 북이스라엘의 이세벨을 생각하게 됩니다. 북 이스라엘의 오므리왕은 악한 왕이었지만 무역을 통해 나라를 발전시키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두로와 시돈의 왕과 협정을 맺고 무역을 하게 됩니다. 그러다 시돈왕 엣바알과 사돈을 맺게 됩니다. 엣바알에게는 이세벨이라는 딸이 있었습니다. 자기 아들 아합과 이세벨을 부부가 되게 한 것입니다. 시돈왕 엣바알은 아세라 신의 제사장으로 지냈습니다. 그러니 그 집안이 얼마나 우상을 숭배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세벨이 북이스라엘로 시집올 때에 자기 혼자만 온 것이 아니라 자기가 섬기는 온갖 우상을 다 가지고 온 것입니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은 바알과 아세라 신을 숭배하면서 하나의 국교처럼 여길 만큼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두아디라 교회에 이세벨이 교회 안에 들어왔는데, 그녀는 자칭 선지자라고 하는 여자입니다. 그리고 그가 한 일은 예수님의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재물을 먹게 한 것입니다. 이세벨이 한 일 가운데 가장 큰 역할은 사람을 꾀는 것입니다.
두아디라 지역은 당시 길드 형태의 경제 시스템이 있었습니다. 상업과 제조업을 중개하는 무역의 통로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이곳에 길드라고 하는 협동조합 형태의 경제조직이 다른 곳보다 발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길드 조직은 이방 종교와 상당히 밀착되어 있었습니다. 길드 조직은 축제를 벌였는데 우상숭배를 핵심으로 하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 조직 안에서 우상숭배를 거절한다는 것은 상호 간에 신용과 사업의 특혜를 잃어버리는 것이 됩니다. 이처럼 초대교회 안에는 이런 조직의 말을 듣지 않을 수 없어 자연스럽게 우상을 숭배하면서 교회를 어지럽게 하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런 그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22절과 23절에서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고 하십니다. 왜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그것은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23절에 말하고 있는 것처럼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예수님의 참된 관심사가 어디에서 출발하시는지를 보게 하십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이런 환경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믿음을 지킨 사람들을 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을 칭찬하고 있습니다. 19절에서 ‘네 사업’은 ‘너희 행위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네 종류의 행위를 말합니다. 사랑, 믿음, 섬김, 인내입니다. 참된 사랑과 믿음이 있는 공동체가 볼 수 있는 열매들은 섬김과 인내입니다. 그러나 일은 그렇게 열심히 하면서 정작 그 이세벨을 용납하는 것을 주님은 책망하십니다. 외적으로는 교회에 열심이고, 성실한 것처럼 보이지만 내면은 다른 것을 추구하고 있고 주님과 상관없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그것은 결코 주님의 칭찬을 받는 행위들이 될 수 없습니다. 세상이 어떻게 변화한다 할지라도 그것에 의해 흔들리지 않고 여전히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을 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그리고 그런 자들에게 예수님은 그들에게 분명한 미래를 약속하십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두 가지를 약속하십니다. 첫째는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십니다. 둘째는 새벽 별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새벽별은 주님을 가리킵니다. 새벽은 모든 어둠이 물러가는 시간입니다. 아침이 왔음을 알리는 시간이 새벽별이 뜨는 시간입니다. 아침을 누리도록 해 주시겠다는 말입니다. 새나라, 새 아침을 맞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