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말합니다. ‘내 분깃을 내게 주십시오.’ 둘째 아들은 아버지가 아니라 재물이 있으면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이 재물로 말미암아 그는 아버지와의 관계를 단절하였습니다. 둘째 아들은 생각하기를 이렇게 하면 자유가 있을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 밑에서 속박받는 삶을 살지 않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고, 내 뜻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먼 나라로 갑니다. 재산을 다 없애버립니다. 그제서야 재물이 한계가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처럼 모든 것을 상실해 버린 둘째 아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들로 나가 돼지를 치는 것이었습니다. 먹을 것을 주지 않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는 절망을 느끼게 됩니다. 그 절망의 끝자락에서 마음 속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집입니다.
둘째 아들은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갑니다. 아버지는 거리가 먼데도 불구하고 그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을 반겨맞으며 목을 안고 입을 맞춥니다. 이때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말합니다. 내가 하늘과 아버지에게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불리우는 것을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말합니다.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이것이 구원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의 사역을하시면서 계속해서 선포하신 것은 구원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구원이야기 속에는 심판도 있고 구원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한 편으로 보면 심판이 될 수도 있고, 다른 한 편으로보면 구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런 사고방식이 매우 분명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각은 좀 더 포괄적인 것이었습니다. 자기들 스스로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믿었던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에게는 심판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저주 받을 것이라고 알고 있었던 죄인들이나 이방인들에게는 구원이 선포되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구원은 당시 율법 아래 매여있던 사람들보다 좀 더 넓게 적용이 되어 이방인들에게, 그리고 소외되고 어려움이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선포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선포의 핵심은 구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구원이야기는 심판을 삼켜 버렸다고 표현할 만큼 구원의 선포가 강력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선포하신 구원은 무엇으로부터 구원하시는 것이겠습니까? 구원은 어떤 상태로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 상태가 죄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구원은 죄라고 하는 상태로부터 벗어나 자유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죄를 단독으로 쓸 때도 있지만 죄를 말할 때 일반적으로 죄인을 말합니다. 성경에서 죄인을 정의할 때 하나님의 계명이나 하나님의 뜻에 거역하는 자를 죄인이라고 말합니다. 세상 속에 들어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고 위반하는 것이 죄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인간의 자기중심적인 의지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 안에 있는 정욕을 말합니다. 이런 것들은 하나님을 잃어 버린 상태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피조물인 우리가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잃어 버린 상태, 상실한 상태, 하나님을 떠난 상태를 가리켜 죄라고 말합니다.
그러기에 죄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성 속에서 보아야합니다. 어떤 잘못을 하고 있는 사람이 문제인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으로부터 우리가 멀어지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지으면 하나님으로부터 떠나갑니다. 반대로 구원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아버지께로 돌아온 둘째 아들이 얻은 가장 중요한 것은 아버지와의 관계 회복입니다. 예수님은 죄인으로 살아가던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신 분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