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의 시작은 선생이 되지 말라는 권면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왜 야고보는 선생이 되지 말라는 권면으로 시작할까요? 남을 가르친다는 것은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말을 하게 되고, 그 말을 통하여 가르치게 됩니다. 야고보는 1절 중간에 보면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더 큰 심판은 선생이 더 큰 심판의 잣대를 가지게 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2절에서 ‘왜냐하면’이라고 시작합니다. 왜 선생이 되는 것이 위험하다고 말하고 있는지를 설명합니다. 우리는 모두 다 말에 실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말에 실수하지 않는 사람은 바로 성숙한 사람입니다. 온전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성숙한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은 믿음을 보여주는 말이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성숙한 선생이 보여 줄 수 있는 말은 궁극적으로 구원을 가져오는 진리의 말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1장18절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심어주신 말은 진리의 말씀이라고 하였습니다. 1장21절에서는 영혼을 구원할 능력이 있는 말씀이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이런 사람이 온 몸을 다스릴 수 있는 온전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온 몸이라고 할 때 몸은 교회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온전히 교회를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은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가 말을 할 때 조심해야 하는가를 비유로 이야기합니다. 3절에서 7절의 말씀입니다. 여기서 야고보가 말하려고 하는 것의 핵심은 조종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말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은 타는 말입니다. 말은 그 입에 재갈을 물리면 꼼짝을 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어디로 이끌고 가든지 그대로 끌려오게 됩니다. 배도 마찬가지입니다. 배가 아무리 크고 풍랑에 밀려도 배 뒤 아래 물속에 달려 있는 키가 배를 사공이 원하는대로 끌고 가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말과 배는 작은 것으로 인해 그 큰 말과 배를 조종할 수 있는 것처럼 사람이 혀는 매우 작습니다. 그러나 그 혀끝으로 나오는 말로 인해 그 사람의 삶이 움직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혀는 불이라고 말합니다. 불은 모든 것을 태워버립니다. 작은 불씨여도 그 불씨가 퍼져나가기 시작하면 온 산을 태우고, 온 마을을 태우게 됩니다. 공동체를 파괴하고, 교회를 태우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혀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겠습니까? 7절에서 12절까지입니다.
7절에 보면 세상의 동물들은 다 길들일 수 있다고 말합니다. 들짐승도 바다의 생물도 길들일 수 있습니다. 길들일 수 있다는 말은 사람이 통치권을 행사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정작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인간을 다스리는 힘은 잃어버렸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바로 혀입니다. 사람이 길들일 수 없는 것이 바로 혀입니다.
야고보는 말하기를 이 혀가 주님이신 아버지를 찬양하기도 하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사람을 저주하기도 한다고 말합니다. 또한 이 입으로 찬양도 하고 저주도 합니다. 그러면서 야고보는 말하기를 이것은 옳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한 샘물에서 단물과 쓴물이 동시에 나올 수 없는 것처럼, 나무의 종류대로 그 나무의 열매를 매는 것처럼 일관성이 있어야 하는데 인간의 혀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믿음의 말을 함으로서 온전한 믿음을 드러내며 살 수 있는지를 소개합니다. 1:19-21에 보면 듣기는 빨리하고, 말하기는 더디하고, 노하기도 더디하라고 말합니다. 4:11-12에 보면 서로 헐뜯지 말라고 말합니다. 5:9에서 심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서로 원망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5:12에서 함부로 맹세하지 말라고 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