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가 보내는 편지는 형제들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1:1에 보면 ‘흩어져 있는 열 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라고 말합니다. 디아스포라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보낸 편지입니다. 여기에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란 전제가 있습니다. 구원의 확신을 가진 사람들에게 전하는 편지입니다. 이런 형제들에게 요구되는 믿음이 어떤 믿음인지를 소개합니다.
야고보가 말하고 있는 형제들이 소유해야 하는 참된 믿음은 믿음의 온전함을 추구하는 믿음입니다. 22절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온전하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일반적으로 온전하다고 할 때 완벽한 것을 말하지만 여기서 온전하다는 말은 성숙하다. 결실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온전한 믿음을 이야기하면서 먼저 무엇이 온전한 믿음이 아닌지를 소개합니다.
먼저 야고보는 온전하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14-17절에 보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소개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그 믿음으로 말미암은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노력합니다.
또 하나 야고보는 온전하지 않는 믿음은 거짓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18-19절에 보면 거짓 믿음을 두 가지로 소개합니다. 하나는 믿음과 행위가 분리되었다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18절에 어떤 사람들은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믿음과 행위를 분리시키는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것과 행위라는 것을 분리시킬 수 없습니다. 이 둘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분리하여 판단하는 것이 거짓 믿음입니다.
둘째는 신조에 대한 동의와 믿음을 같은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19절에서 야고보는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는 교리는 구약에서부터 계속하여 외쳐지던 것입니다. 당시 초대교회도 이것을 분명히 믿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은 단순히 기독교 만의 교리가 아니었습니다. 유대교의 분명한 교리입니다. 또한 이방인들 가운데도 이런 교리를 믿었습니다. 오늘 야고보는 심지어는 귀신도 믿는다고 말합니다. 물론 이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는 지식과 더불어 한 분이신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지식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게 만들어야 하는데 하나님과 상관없이 지식으로 끝날 때가 많습니다. 야고보는 이것이 바로 거짓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참된 믿음은 무엇입니까? 참된 믿음을 보여주는 온전한 믿음을 20-26에서 예를 들어서 직접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아브라함과 라합의 이야기를 가지고 설명합니다. 아브라함은 창세기 22장에서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바칩니다. 이는 이삭을 바친 것이 아브라함이 의롭게 되는 과정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미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았습니다. 이렇게 의롭다고 인정받은 아브라함의 삶은 자연스럽게 아들 이삭을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바칠 수 있는 믿음이었던 것입니다.
라합도 마찬가지입니다. 라합에게는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신다는 믿음이 분명하게 있었습니다. 여호수아 2:9에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라고 라합이 고백합니다. 그리고 이 믿음의 고백이 확실함을 그녀의 행동으로 보여 주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정탐꾼들의 생명을 보호하여 다른 길로 나갈 수 있도록 안내하였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