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들의 특징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매우 바쁩니다. 왜냐하면 이것저것 할 것이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이런 바쁜 삶의 특징은 내가 진짜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놓쳐버리는 것입니다. 다양하게 하고 싶은 것, 해야 할 것은 많은데 무엇을 위해 하는지를 모릅니다. 그리고 정신없이 해야 할 것들에 매여 살아갑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살면서 정말 누려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무엇을 발견해야 할까요?
성탄절은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신 날입니다. 그래서 성탄절의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발견하고 나를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예수님을 보기보다 다른 것에 더 많은 신경을 씁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을 필요하게 여기는 것보다 더 강하게 우리를 이끌어 가는 것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시 온 이스라엘이 그토록 기다리고 기다리던 메시아였습니다. 메시아는 그들을 구원할 자입니다. 구원한다는 것은 삶의 환경을 바꾸고, 삶의 목표를 바꾸고, 삶의 누림을 바꾸는 것입니다. 이처럼 간절하게 기다리던 메시아가 오실 때 그 메시아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먼저, 성경에서 예수님을 발견하지 못한 사람들의 모습을 잠시 살펴봅시다.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오심에도 불구하고 그 예수님을 보지 못하였던 사람들입니다.
여관의 주인입니다. 당시의 상황은 1절에 말하고 있는 대로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모든 백성들이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 인구조사에 참여하여야 했습니다. 그래서 3절에 보면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라고 기록합니다. 엄청난 사람들이 이동하였습니다. 이때 가장 분주한 사람은 여관의 주인입니다. 대목을 맞았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여관에 머물렀는지 예수님께서 해산할 때가 되었을 때에 방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구유에 뉘었다고 하였습니다. 여관 주인은 자기의 유익에 갇혀 메시아에 대하여 쳐다 볼 여력, 관심을 가질 여력을 갖지 못하였습니다.
또한 헤롯입니다. 당시 로마의 지배아래 있던 팔레스타인 지역입니다. 헤롯은 한 지역을 담당한 분봉 왕이었습니다. 헤롯은 마태복음에 보면 동방의 박사들과 만난 사람입니다. 박사들은 유대인의 왕을 찾았습니다. 그러자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하였습니다. 헤롯은 베들레헴에서 예수님이 태어날 것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경배하기 위한다고 말은 하지만 경배가 아니라 죽이기 위한 전략을 폈습니다. 그는 자신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시는 예수님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참된 진리가 아니라 자기의 권력과 명예를 지키는 것이 헤롯의 삶의 모든 가치 기준이 되었습니다. 그랬기에 그는 예수님을 볼 수 없었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그 당시 예수님이 오심을 보고 누린 사람들이 있습니다. 목자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목자는 당시 사회 구조에서 별로 인정받지 못하던 사람들입니다. 심지어 그들은 법정에서 증언할 수 있는 권리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아주 단순하고 겸손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입니다. 바로 이런 목자들에게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그들에게 말합니다. 그리고 그 소리와 그 장면은 그들에게 들려지고 보였습니다. 결국 그들은 그것을 받아 들여 별이 이끄는 대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동방박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다양한 지식이 있었지만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것을 알기 위해, 발견하기 위해 그 진리를 따라 예물을 준비하여 베들레헴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