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은 밧세바와 간음을 했습니다. 더 나아가 그녀를 임신하게 하였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그녀의 남편인 우리아를 전투의 최전선에 보내어 죽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살해행위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마치 우연히 일어난 일인 것처럼 꾸몄습니다. 다윗이 바라는 대로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감추어질 것은 감추어진 것 같습니다. 다윗이 원하는 대로 밧세바를 아내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은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다윗의 그 행위들은 모두가 악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은 다윗에게 말합니다.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냐!’라고 외치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여호와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행위입니다. 밧세바도 이 상황 속에서 눈물을 흘리며 아파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짜 아파하고 안타까워했던 분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이야기를 들은 다윗은 정신을 차리게 됩니다. 그동안 끌려 다니던 자기 안의 유혹으로부터 정신을 차리고 여호와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외칩니다.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나이다.” 우리가 죄를 발견하게 되었을 때 가장 먼저 고백해야 하는 것은 내가 여호와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다는 고백입니다. 회개가 모든 것의 우선이 되어야 합니다. 회개는 하나님의 구원을 누리기 위한 가장 첫 단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회개가 있었다고 해서 내가 잘못한 일로 말미암은 죄의 결과들이 갑자기 다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죄의 결과로 말미암은 열매들은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14절에 나옵니다. ‘여호와의 원수가 크게 비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으니 당신이 낳은 아이가 반드시 죽으리이다.’ 그 나단의 말 대로 아이가 죽습니다. 아이가 아플 때에는 금식하며 매달리던 다윗도 아이가 죽었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는 땅에서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 경배하고 왕궁으로 돌아옵니다. 아이가 살아 있을 때에는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려고 최선을 다해보지만, 아이가 죽고 나면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자신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보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 새로운 도전을 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다윗은 밧세바에게 나아갑니다. 지금 밧세바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자기 원래 남편의 죽음 전모를 알게 되지 않았겠습니까? 그 아이의 죽음도 그냥 무엇인가 잘못되어 죽는 것이 아니라 죄의 결과로 말미암아 일어난 사건임을 알게 되었을 때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24절에서 다윗은 밧세바를 그의 아내라고 표현합니다. 밧세바를 아내라고 지칭하는 것은 여기가 처음입니다. 그리고 그를 위로하였다고 합니다. 이 위로라는 단어에는 위로라는 의미도 담겨 있지만 후회하다는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밧세바를 향하여 자신의 행위가 얼마나 어리석고 부주의한 것이었는지를 후회하고, 다시 말하면 회개하고, 그리고 그런 회개와 솔직한 마음의 변화를 고백하며 위로하였을 것입니다. 참된 회개는 하나님을 향한 회개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 회개의 마무리는 당사자에게도 이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다시 풀어짐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밧세바와의 관계가 풀어집니다.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하여 아들을 낳습니다. 그의 이름을 솔로몬이라고 짓습니다. 더 나아가 이런 관계의 회복이 여호와와의 회복으로 이어집니다.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사 선지자 나단을 보내 그의 이름을 여디디야라고 짓습니다. 그 뜻은 여호와께서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 사랑받은 결과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