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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은 사울이 죽은 이후에 통일 왕국의 왕으로 세워지게 됩니다. 남과 북을 통합한 왕이 된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새로운 수도로 정하였습니다. 그리고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오게 되었습니다. 법궤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입니다. 이처럼 법궤를 가져오게 되었다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진정한 통치자이시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다윗의 왕 됨은 다른 나라의 왕들의 왕 됨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다른 나라의 왕 됨은 왕 자신이 최고이지만 다윗의 왕 됨은 여호와 하나님이 왕이심을 증거 하는 자로서의 왕입니다. 다윗은 단순히 이 땅의 한 나라의 왕으로서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하나님 나라의 대리자로 서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야 하는 다윗의 삶에 인간의 연약함이 드러나 죄를 범하게 되는 장면이 나옵니다. 왕들이 출전할 때가 되었지만 다윗은 부하들을 전장으로 보내고 자신은 왕궁에 남아 있습니다. 목욕하는 밧세바를 보고 그녀를 데려와 간음을 합니다. 그 결과 아이가 잉태되었습니다. 밧세바를 아내로 취하기 위해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를 죽게 만듭니다. 하나님께서 죄와 그 결과를 다루십니다. 죄에 대한 판결과 결과를 소개합니다. 아이가 죽습니다. 죄의 열매가 회수됩니다. 밧세바가 다시 임신하고 솔로몬을 낳습니다.

 

그렇다면 왜 다윗이 이런 죄에 빠지게 되었을까요?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친 장면과 다윗의 밧세바로 말미암아 무너지는 장면은 다윗의 삶 속에서 매우 중요한 두 개의 사건으로 남아 있습니다. 골리앗을 만날 때의 다윗과 밧세바를 만날 때의 다윗은 전혀 다른 차원으로 반응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골리앗 앞에서의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였습니다. 골리앗을 만났을 때 다윗은 분명한 정체성이 있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으로 내가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내가 전쟁을 치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밧세바를 만나는 장면에서는 점점 그 생각들이 희석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본문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는 ‘보낸다’는 동사입니다. 11장과 12장에서 다윗이 밧세바를 인하여 죄를 짓는 장면에서 여러 번 등장하고 있습니다. 보낸다는 말은 누군가에게서 누군가에게로 음직이게 한다는 말입니다. 1절에서 다윗은 왕들이 출전하는 전쟁에서 요압의 부하들과 온 이스라엘 군대를 보내게 됩니다. 이것은 왕으로서 보내야 할 시점에 보내야 할 사람들을 보내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3절에 가면 다윗이 밧세바를 발견하고는 사람을 보내게 됩니다. 여기서는 지극히 사적으로 자기의 왕권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을 보내어 그 여인을 알아보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4절에서는 한 단계 더 발전합니다. 전령을 보내어 그 여자를 자기에게로 데려오게 한 것입니다. 자신의 개인적이고 불법적인 행동을 위해 사람들을 보낸 것입니다. 5, 6, 12, 14, 18, 22, 27절에 계속하여 이 보낸다는 단어가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단어는 점점 죄 속으로 들어가게 하는데 사용된 단어입니다. 그리고 다윗의 행동이 얼마나 나쁜 것인가를 드러내는데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 중에 완전한 의인은 없습니다. 다윗이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지만 그도 인간이었기에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환경으로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죄에 대하여는 한 순간도 우리가 방심하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죄는 한 순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점점 확장성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심각한 파괴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높은데 올라가서 무엇인가 잘 될 때 우리는 죄를 짓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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