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삶에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기도의 능력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기도하지 않습니다. 말씀의 능력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말씀을 읽지 않고 삶의 자리에 적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종교적인 삶은 살아갑니다.
당시 예수님은 여리고를 지나가시려고 들어가셨습니다. 통과하시려는 그 길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소식을 듣고 몰려나왔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무리들 가운데 어떤 사람도 예수님을 붙잡아 두지 못하였습니다.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쳐다보기만 하였습니다. 그때 그곳에 삭개오라는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는 세리장이었습니다. 그도 다른 사람들처럼 예수님을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결단을 하여 돌무화과나무 위로 올라갑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눈이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부르시며 그의 집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 집에서 놀라운 선포가 일어납니다. 그것은 바로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의 주인공은 삭개오이지만, 엄밀하게 보면 삭개오와 무리들을 비교하여 말씀하고 계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무리들은 어떠하였습니까? 성경에 보면 다양한 이유들로 인하여 예수님을 누리지 못하고 복음의 능력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이 하는 주된 일은 예수님을 바라볼 때 자신들과는 상관없이 구경만 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그 예수님을 보겠다고 길거리로 나온 사람들입니다. 또한 그들이 잘 하는 일은 평가하고 판단하는 일입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볼 자격이 없다는 자라고 판단하였습니다. 그래서 삭개오가 예수님을 볼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지 않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께서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시는 것을 가지고 수군거렸습니다. 그러면서 말합니다.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다는 말 속에는 죄인처럼 살려고 들어가셨다고 비난하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삭개오의 집에 들어갔습니다. 예수님이 죄인의 집에 들어가신 것은 자신이 죄인처럼 되기 위함이 아니라 죄인을 자신처럼 되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무리들의 이런 행동이 예수님을 자기들의 집에 머물게 하지는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삭개오는 어떻습니까? 삭개오는 어떻게 하여 예수님을 자기의 집에 머물게 하였습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보기를 갈망하여 돌무화과나무 위에 올라간 사건 때문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보려고 하는 열정 때문입니다. 그가 마음을 뛰어 넘어 행동으로 옮긴 열정 때문입니다. 행동을 넘어 감정을 다하여 보여준 그의 열정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을 내 삶의 현장에 모시고 있습니까? 이름만 모시고 있습니까? 아니면 실제 예수님이 우리의 삶의 현장에 함께하고 계십니까? 오늘 우리는 예수님을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 위로 올라갔습니까? 예수님은 비록 지나가시는 길이라 할지라도 그를 향하여 달려오는 한 사람을 절대로 외면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도전하는 사람을 쳐다보십니다. 그리고 그 안에 들어가셔서 구원을 선포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영적 갈망을 회복해야 합니다. 도전하는 신앙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습관적이되고, 나태한 신앙으로는, 소극적인 신앙으로는 예수님을 내 삶에서 누릴 수가 없습니다. 그냥 구경꾼과 다를 바가 없는 무리들이 되고 맙니다. 영적갈망이 있을 때 우리는 진정한 예수님의 구원의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