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절에서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게 됩니다. 성령은 육체를 거스릅니다.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육체와 성령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우리를 이끌게 됩니다. 육체를 따라가게 되면 성령으로 말미암아 누리기를 원하는 삶을 살 수 없고, 성령을 따라가면 육체로 말미암아 누리기를 원하는 것들을 하지 않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행하지 말아야 하는 육체의 일은 어떤 것이 있습니까? 19절에서 21절까지는 육체의 일, 즉 육체를 따라 살아감으로 나타나는 결과들을 소개합니다. 이 욕구들을 크게 네 가지 영역으로 묶을 수 있습니다. 성, 종교, 사회, 음주의 영역입니다.

첫 번째는 성입니다. 19절에서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이라고 말합니다.

두 번째는 종교입니다. 20절에서 ‘우상숭배와 주술’입니다.

세 번째는 사회적 영역입니다. ‘원수 맺는 것, 분쟁, 시기, 분냄, 당 짓는 것, 분열함, 이단, 투기’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음주의 영역입니다. ‘술 취함과 방탕함’입니다.

반면 그리스도인이 누려야 할 성령의 열매는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입니다. 이 아홉 가지 성령의 열매를 묶음으로 이해하려고 본다면 세 묶음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다른 사람을 향하여, 그리고 자신을 향한 것으로 나눕니다.

먼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말하는 것은 ‘사랑과 희락과 화평’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무한한 사랑으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희락은 기쁨입니다. 구원받은 자의 근원적인 기쁨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화평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화해로 말미암아 누리게 되는 평강입니다. 하나님과의 평강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향한 것, 다시 말하면 사회적 미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입니다. 오래 참으신 하나님을 따라 다른 사람을 관용할 줄 아는 성품입니다. 자비는 친절한 성품입니다. 양선은 선한 성품과 행동을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자신을 향한 것으로 ‘충성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충성은 그리스도인의 신빙성을 말합니다. 믿음을 가지고 사는 삶입니다. 온유는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겸손한 온순함입니다. 그리고 절제는 그 목록의 결론과 같은 것입니다. 스스로를 다스릴 수 있는 힘입니다.

24절의 말씀에 의하면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입니다. 이 말은 육체를 따라 사는 자들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16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성령을 따라 행할 수 있겠습니까? 18절에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합니다. 25절에서도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의 행할지니.’라고 말씀합니다. 성령의 일들은 그 일을 하려고 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으로 살아야 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열매로 충성의 삶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에 충만하십시오. 성령의 인도하심에 민감하십시오. 성령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