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시 돌아가지 마십시오.
8절에 보면 갈라디아 교인들이 예수님을 믿기 전의 과거의 상태를 말합니다. 그 때에는 그들은 이방인이었습니다.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하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율법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랬던 그들이 9절에서 이제는, 지금은 하나님을 아는 자들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신분이 바뀌고 삶이 바뀐 갈라디아 교인들이 이제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간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종노릇 하려합니다. 이 말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대적자들, 선동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마음을 빼앗겨 그들이 주장하는 율법을 지켜야만 한다는 이론에 유혹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신앙이 뒷걸음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종노릇하던 것에서 자유한 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그들에게 종노릇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두 번씩이나 ‘다시’라는 말로 돌아가느냐고 안타까워하며 말하는 방향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상태로의 회귀가 아니라 유대인들이 지키며 매여 있던 율법적인 성도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 하나님이 아십니다.
잘못된 길을 걸어가는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9절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바른 관계로 돌아가는 길을 제시합니다.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우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알고 계신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는 것에는 별로 문제가 없습니다. 내가 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를 아신다는 대목에서 흔들리는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어떤 어려움이 생기면 우리는 흔히 생각하기를 하나님이 나를 알고 계실까? 잊어버린 것은 아닐까? 염려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도 모르게 율법적인 행동으로 그 보상을 하려고 노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고전 8:3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주시느니라.’
신 32:10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
- 우리의 목표는 분명합니다.
목표를 정한다는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면서 한 순간 가져야 하는 목표와 우리의 전 인생의 목표를 혼돈해서는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은 18절에서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히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뿐만 아니라 언제든지 좋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19절에서 사도 바울은 그것을 이렇게 말합니다.
갈 4:19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갈라디아 교인들 안에 어떤 행위를 잘하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형상이 드러나고 있는가가 더욱 중요한 목표인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사도 바울은 해산하는 수고를 한다고 말합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일은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아닙니까? 그렇지만우리가 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우리의 목표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