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십자가를 보십시오.
1절.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십자가를 본다는 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다는 것은 십자가 위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그 일을 보는 것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그 일을 본다는 것은 그 일로 말미암아 오늘 내가 누구인가를 보는 것입니다. 오늘 내가 누구인가를 본다는 것은 내가 오늘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 가를 보는 것입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은 어리석다고 하였습니다. 왜 어리석다고 말합니까? 지금 세상이 유혹하는 그 유혹을 따라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어리석음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은 다시 내 눈 앞에 보이는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보아야 하는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단순히 나무 십자가나 목걸이 십자가의 십자가입니까? 그것을 뛰어 넘어 그 십자가가 주는 능력을 보아야 합니다.
- 성령을 받으십시오.
우리가 지혜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눈을 열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성령이 우리에게 하나님을 드러내며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만들어 주십니다. 바울은 2절에서 이런 역할을 하시는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은 결과인가? 아니면 듣고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냐를 묻습니다.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아 성령을 받는다는 말은 내가 율법을 지키고 어떤 행위의 자리에 나아갈 때에라야 성령이 임하시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듣고 믿음으로 말미암았다는 말의 뜻은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성령은 이미 내 안에 임하여 계십니다. 다시 말하면 주권자로서 이미 나를 다스리고 계시고, 이끌고 계시며 돕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가지 아니하고 세상 사람들의 꾀임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 안에 임하신 성령의 능력을 알지도 못하고 누리지도 못하고 있기 때문인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안에 임하신 성령을 인정하고 믿음으로 나아갈 때 그 능력이 우리 안에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 성령으로 마치십시오.
3절.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마치겠느냐고 할 때 마친다는 말은 완결을 의미합니다. 어느 한 작업을 마치고 또 다른 작업을 하는 마침이 아닙니다. 완전히 끝내는 마침입니다. 3절에서는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는 것을 비교하며 설명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성령으로 시작하였으면 끝까지 성령으로 달려가 마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떻습니까? 성령으로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으로 살지 아니하고 육체적인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며 살아갑니다. 다시 말하면 성령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스스로 완결해 보려고 노력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 노력하고 애를 씀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인정을 받으려고 합니다. 또한 더 나아가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으려고 합니다. 이것은 육체로 사는 삶입니다. 성령으로 마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