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다른 복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 (6-7)

6절에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마치 광야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속히 떠나 우상을 향하여 절하며 섬겼던 것처럼, 갈라디아 교회 안에도 그들의 구원의 확실성을 붙들지 못하고 그들의 마음이 여호와 하나님을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찾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떠나게 되면 다른 복음을 붙들게 됩니다. 그 다른 복음은 여호와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바로 사람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임재를 누리지 못하고 자기들 눈에 모세가 빨리 나타나지 않자 여호와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하고 있지 못하다고 느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송아지를 만들었던 것처럼, 여호와 하나님의 임재를 누리지 못하며 살아갈 때 사람들은 사람의 복음을 가지고 이것이 진짜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우리를 부유하게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우리를 자유하게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떠난 것이기에 참된 복음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1. 바꾼 복음이 아니라 받은 복음 (8-9)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게 강력하게 선포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을 본 사람들의 이름을 쭉 나열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들은 모두 예수님께서 살아계실 때부터 예수님을 보았던 사람입니다. 자기들이 본 것을 믿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 그를 만난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이후에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사도들이 전하였던 예수님과 바울이 만난 예수님은 같은 분이셨습니다. 그랬기에 사도 바울은 자신이 예수님을 만났다고 전하면서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 만났던 사람들과 자신의 만남을 동일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수 있는 힘은 내가 복음이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복음은 사도들이 전해 준 것이며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들입니다. 다른 복음이라고 하는 말에서 ‘다른’이라는 말은 벗어났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결말은 ‘저주를 받을지어다.’ 하나님의 심판의 진노에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1.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복음 (10)

10절의 말씀입니다. 과거에는 하나님을 좋게 했던 내가 이제 와서 사람을 좋게 할 수 있느냐라는 강력한 부정의 의미로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사람들의 지지와 환심을 얻으려고 복음을 왜곡시킬 수 없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은 자신의 분명한 정체성이 그리스도의 종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도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종은 자신을 기쁘게 하는 자가 아니라 그 주인을 기쁘시게 하는 자입니다. 만약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우리는 좋은 말만 해야 합니다. 괜찮습니다. 그렇게 해도 됩니다. 아무렇게나 살아도 됩니다. 아무렇게나 믿어도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의 잠시 기쁨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진리이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진리를 선포해야 하고 그 진리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