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리고 교인들은 그 몸의 지체들입니다. 그러기에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각 지체들이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어야 합니다. 교인들이 몸인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없이는 교회에서 하는 사역은 그냥 일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을 때 우리의 헌신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데 사용됩니다. 모든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지체들로서 분명한 자기 정체성을 가져야 합니다.
이런 지체로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양한 은사들을 부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에서는 그 은사들을 가지고 서로 경쟁하듯이 자기의 은사가 더 크고 중요하다고 말함으로 인해 갈등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마치 권력을 잡듯이 은사를 그렇게 분류하여 몸인 교회를 세우기 보다 자기 은사를 드러내는데 집중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12장 31절에서 사도 바울은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권면합니다. 가장 좋은 길을 보여 주겠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더욱 큰 은사가 사랑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은사를 사용하는 가장 좋은 길은 바로 사랑이란 말입니다.
교회가 모든 일을 사랑으로 감당할 때 은사가 진정한 은사로 일하게 됩니다. 그것을 13장 1절에서 3절에 말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모든 은사는 헛된 것이 되어 버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영적으로 탁월한 일을 한다고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결코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1절에서 말하는 방언을 하거나 천사의 말을 한다고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그 소리는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가리가 되어 버리고 맙니다. 방언으로 천상의 말을 하고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보여져도 사랑이 없으면 그것은 시끄러운 소음에 불과합니다. 2절에서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지식을 알고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랑이 없으면 나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 버리고 맙니다. 3절에서 아무리 구제를 하고 희생을 해도 사랑이 없으면 유익이 없습니다. 의무로 하는 섬김과 구제는 그 열매를 보기가 어렵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내적동기를 보게 합니다. 우리가 사랑으로 하지 않으면 그 어떤 은사도 아무 소용이 없게 됩니다.
사랑은 어떤 본질을 가지고 있겠습니까? 4절에서 7절에서 먼저 두 가지 긍정적 표현을 합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합니다. 그리고 여뎗가지 부정적 표현을 합니다. 시기하지 아니하며,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않습니다. 그런 다음 다시 긍정적인 사랑을 가진 사람의 모습을 소개합니다.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는 사람입니다.
마지막으로 사랑의 영원성에 대하여 말합니다. 은사는 잠깐이지만 사랑은 영원하다는 이야기로 우리가 무엇에 초점을 두어야 하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8절부터 13절까지입니다.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랑은 영원하게 될 것임을 말합니다. 사랑은 모든 관계를 이어주는 끈과 같습니다. 초대교회가 말하는 신앙의 본질은 세 가지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입니다. 이 세 가지는 폐지되지 않고 영원할 것입니다. 인간은 언제나 하나님을 믿고 바라는 존재로서 하나님의 은혜로 그의 신성을 누리게 됩니다. 그때 사랑은 인간과 하나님, 그리고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결정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 사랑이 믿음을 가지게 하고 소망을 가지도록 만들어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