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내다’는 말의 의미는 몹시 바라다, 갈망하다, 기뻐하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바라고 기뻐하는 것 중에는 긍정적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도 있지만 부정적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도 있습니다. 우리에게 허락된 것을 바라고 갈망할 때는 좋은 의미로 사용이 되지만 그렇지 아니하고 우리에게 금지된 것들을 바라고 갈망할 때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이 됩니다. 내가 탐내지 말아야 할 영역을 탐낼 때 탐내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십계명 가운데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이와같은 계명들은 외적으로 행동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마지막 계명은 행동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입니다. 탐내는 것은 외적인 행위 이전에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문제입니다. 탐심이 강해지면 주변의 모든 것들을 내 것으로 만들어 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탐심이 줄어 들지 않으면 남의 아내와 종들에게까지 관심을 가지게 되고 그것마저도 내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탐심의 자리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것을 10계명이 금하고 있는 것입니다.
단테는 윤리적, 정치적 차원에서 훨씬 심각한 사회적 부패와 폐해를 낳는다는 점에서, 탐욕을 탐식이나 정욕보다 훨씬 더 악한 죄로 간주하였습니다. 탐욕은 남과 나누려 하지 않는 인색함과 오직 자신만을 위해 흥청망청 소비하는 탕진이나 낭비라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런 속성 때문에 탐욕은 이웃에 대한 사랑을 극도로 제한하고, 한편으로는 도박이나 투기라는 또 다른 형태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이것이 심해지면 분별력을 잃고 이웃의 재산이나 심지어 친구의 배우자까지도 자기 소유로 삼고 싶어 합니다. 십계명의 열 번째 계명은 인간의 바로 이런 성향, 경향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는 계명입니다.
인간에게 왜 이런 탐욕이 일어나겠습니까? 사막 수도사들은 탐욕의 원인을 두 가지로 보았습니다. 하나는 자신을 지키고 삶을 안전하게 유지하려는 마음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내적결핍입니다. 탐욕은 인간의 내적인 결핍이 있는 사람들에게서 더 강하게 일어난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탐욕을 물리치며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탐욕은 마음의 문제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마음을 먼저 다스려야 합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어떤 환경에 처하더라도 자족하며 살 것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자족이란 현재 자신에게 주어진 삶과 소유에 감사하고 만족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감사의 삶은 참된 행복으로 가는 관문과 같은 것입니다. 현재의 삶에 감사하고 만족하며 살아갈 때 거기서 행복은 시작됩니다.
또 하나는 자족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단순한 삶을 살 줄 알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삶을 돌아보며 단순하게 살아가는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삶을 단순하게 사는 이유는 나누기 위한 것입니다. 내 것을 줄이고 떼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때 아름다운 삶이 열려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을 만난 사람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 하나님을 신뢰할 때 거룩한 갈망이 일어나야 합니다.
이번 주부터 대림절입니다. 대림절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을 기억하고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시간입니다. 교회 절기 가운데 중요한 삶의 절기입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이 땅에 오셨습니까? 성경에 보면 예수님은 그 몸이 태어나야 할 때 거할 여관도 없었습니다. 가장 낮은 모습으로 오셔서 겸손의 삶을 사신 주님을 기억하고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삶을 살아가는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