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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 21장이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그 마지막 모습을 우리에게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이야기는 맹세를 기억하게 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맹세라는 것은 자신을 묶는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1절에 보면 그들이 미스바에 모였을 때에 맹세를 하였는데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딸을 베냐민 사람들에게 아내로 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실제 시작은 2절입니다. 베냐민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에 그들은 벧엘에 다시 모였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 앞에 앉게 되었습니다. 경위야 어떻게 되었든지 간에 자기 동족 베냐민 지파를 진멸하고 그들이 완전히 전멸할 위기에 놓였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아파 소리를 높여 울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이 하나님 앞에 앉게 되었을 때 그동안 분노와 흥분된 감정으로 처리했던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마음으로 다시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 그들이 4절에 보면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다고 하였습니다. 자기들의 흥분과 자기들의 생각 속에서 지내다가 이제 하나님 앞에 예배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들의 삶이 완전히 하나님 중심으로 바뀐 것은 아니지만 순간 순간 변화의 생각들과 태도들을 가지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 삶을 지속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5절에 보면 또 다른 일이 벌어집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온 지파 중에 총회에 나오지 않는 자들이 누군가?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미스바에 모였을 때에 여호와 앞에 이르지 아니한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라고 맹세를 하였기 때문입니다. 8절에 보면 이스라엘 총회에 올라오지 아니한 자들이 야베스 길르앗 사람인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10절에 보면 회중이 용사 만 이천명을 그들에게 보내어 야베스 길르앗 주민과 부녀와 어린 아이를 칼날로 치게 됩니다.

그 비극의 꼬리는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야베스 길르앗 주민 중에서 젊은 처녀 사백명을 사로 잡아 데리고 옵니다. 그때 사람들이 림몬 바위에 숨어 있는 베냐민 자손들에게 사람을 보내어 평화를 선포합니다. 그들이 돌아올 때에 야베스 길르앗에서 데려온 여자 400명을 그들에게 줍니다.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베냐민 지파는 600명이 숨어 있었기 때문에 아직 200명이 아내가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선뜻 그들에게 자기의 딸들을 아내로 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맹세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한 맹세 때문에 또 다른 악행이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19절에 보면 실로에 매년 여호와의 명절이 있는데 그 명절 때에 베냐민 지파가 포도원에 숨어 있다가 실로의 여자들이 춤을 추러 나올 때에 몰래 그 여자를 붙들어 가서 아내로 삼으라고 합니다. 보쌈을 하는 것입니다. 알고 준 것이 아니라 납치를 당했으니 맹세와는 상관없다는 논리인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 여자들을 강제로 데려다가 강간한 것입니다. 당한 상황입니까?

그러면서 25절에 이렇게 사사기를 마무리합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다시 말하면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의 진정한 왕이 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가지고 살아갑니까? 다시 한 번 우리의 삶을 여호와 하나님 앞에 앉아서 정돈할 뿐 아니라 그 삶을 우리의 모든 삶의 자리에서 분명하게 고백하고 드러내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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